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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낮 하루 밤에 만 번 죽고 만 번 산다

오작교 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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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일기일회(一期一會) 법정스님 법문집
해마다 이맘때, 햇차가 나올 무렵이면 산에는 꾀꼬리가 찾아온다. 스님은 “꾀꼬리 소리 들으면서 햇차를 마시면 차 맛이 향기롭다.”는 말로 불기 2552년 부처님오신날 법문을 시작했다. 절 마당 가득히, 키 큰 느티나무 위에도 연등들이 걸리고, 그 아래 모인 5천여 명의 청중은 저마다 마음속에 등을 켜고 침묵과 새소리 속에서 법문을 들었다. 저녁에는 환한 연등들 속에서 하모니카 연주회가 열렸다. 이날 로마 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는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전년도에 이어 또다시 축하 메시지를 발표하면서 “불교도들과 그리스도교도들이 모든 생명 가진 존재를 존중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구를 돌보자.”고 말했다. 스님의 잠언집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가 지난주 중국의 21세기 풀판사와 대만의 위안류 출판사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요즘 꾀꼬리 소리 듣습니까? 꾀꼬리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햇차가 나올 무렵이면 꾀꼬리가 돌아옵니다. 꾀꼬리 소리를 들으면서 햇차를 마시면 그 차 맛이 훨씬 향기롭습니다.

   또 진달래 필 무렵이면 반드시 소쩍새가 찾아옵니다. 헐벗고 황량해진 이 땅을 그래도 저버리지 않고 철 따라 새들이 돌아온다는 것은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닙니다. 해마다 잊지 않고 찾아오는 그 의리와 정상(情狀)을 생각하면 눈물겹기까지 합니다. 사람은 곧잘 등지고 배신을 하는데 짐승들은 옛정을 잊지 않고 의리를 지킵니다. 자연현상 속에서 우리는 배울 바가 많습니다.

   이 시대 같은 불자로서 부처님오신날을 함께 축하하게 된 이 인연에 먼저 감사드립니다. 부처님의 존재가 우리들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곰곰이 생각할수록 그 은혜에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리들 자신의 부처에 이르는 길입니다. 타 종교와 불교의 다른 점이 이ㅕ기에 있습니다. 타 종교는 교조를 신앙의 대상으로 섬기고 따를 뿐이지 스스로 그 경지에 이룰 수 있다는 가르침이 없습니다.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동시에 우리들 자신이 부처를 이루는, 부처의 경지에 오르는 길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한평생 많은 위대한 가르침을 펼쳤습니다. 그 가운데 핵심은 ‘자비’입니다. 곧 사랑입니다. 부처님은 자비를 이야기했고 그것을 실천했습니다. 자비의 실천이 있었기에 불교가 종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깨달음만을 주제로 삼았다면 불교는 종교로서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종교는 사랑을 말합니다. 사랑을 말하지 않는 종교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나 대개의 종교는 인간 중심의 사랑에 그칩니다. 이 세상은 인간만 모여 사는 곳이 아니라 만물이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장입니다. 수많은 생명체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조화와 균형의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식물과 동물이 없다면 인간도 생존할 수 없습니다. 식물과 동물이 곁에 있기 때문에 서로 의지하면서 우주적인 조화를 통해 우리가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러나 현 세계의 실상은 한마디로 무자비합니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미국산 소고기 수입 문제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미국소의 광우병이 어디서 왔습니까? 초식동물인 소에게 같은 소의 뼈와 내장을 사료로 먹이기 때문에 소가 미쳐 버린 것입니다. 동양에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을, 서양 사람들은 몇 푼의 이익을 더 남기는 데 혈안이 되어서 태연히 저지르고 있습니다. 만일 사람에게도 사람이 시체를 먹게 한다면 미쳐 버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또한 요즘 조류독감 때문에 날짐승들이 큰 수난을 겪고 있습니다. 아직 병에 걸리지 않은 수많은 닭과 오리까지 산 채로 매장하고 있습니다. 인간 중심의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만 무려 6천만 마리가 생매장되었습니다. 오늘 아침 뉴스를 보니까 서울시장이 시내에 있는 모든 가금류, 집에서 기르는 날짐승들을 모조리 살처분, 생매장시키겠다고 합니다. 이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기계적으로 자행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모든 것이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이런 일은 반드시 업이 됩니다. 업이 되어 인간 자신의 삶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칩니다.

   자비란 무엇입니까? 자비는 사람에 대한 사랑뿐 아니라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에게 이르는 사랑입니다. 불교 초기 경전인 <숫타니파타>에는 여러 경전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 <자비경>에 다음의 내용이 있습니다.
사물에 통달한 사람이 평화로운 경지에 이르러
해야 할 일은 다음과 같다.
유능하고 정직하고 말씨는 상냥하고 부드러우며
잘난 체하지 말아야 한다.
만족할 줄 알고 많은 것을 구하지 않고
잡일을 줄이고 생활을 간소하게 한다.
또 모든 감각이 안정되고 지혜로워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으며
남의 집에 가서도 욕심을 내지 않는다.
   이런 경전 구절을 들을 때마다 자신의 삶을 이 가르침에 비춰볼 수 있어야 합니다. 법문을 듣는 이유는 자신의 삶을 개선하기 위함입니다.

   과연 나 자신은 모든 사물에 만족할 줄 아는가? 많은 것을 구하진 않는다? 무엇을 잔뜩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구하진 않는가? 온갖 복잡한 일에 얽혀 허덕이면서 헤어날 줄 모르진 않는가? 과연 생활을 간소하게 하고 있는가? 이것들을 스스로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감각이 안정되고 지혜로워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가? 남의 집에 가서도 욕심을 내지 않는가? 자기 분수를 알아서 남의 것에 한눈팔지 않느냐는 물음입니다. 경전에서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마치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외아들을 보호하듯이
모든 살아 있는 것에 대해서 한량없는 자비심을 발하라
   모든 살아 있는 것에 대해서 자비심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마치 어머니가 외아들을 보호하듯이 그렇게 무한한 자비심을 발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온 세상에 대해서 무한한 자비를 행하라.
위로, 이래로, 옆으로
그 어떤 장애도 원한도 적의도 없는 자비를 행하라.
서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누워서 잠들지 않는 한 이 자비심을 굳게 가지라.
이 세상에서는 이런 상태를 신성한 경지라 한다.
   여기 ‘자비심을 발하라.’ ‘자비심을 행하라.’ ‘자비심을 굳게 가지라.’ 등의 비스사한 표현들이 나옵니다. 이 표현들에 다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부처는 무엇인가? 자비심입니다. 자비심이 곧 부처입니다. 오늘날처럼 살벌하고 무자비한 세상을, 사람이 살아갈 만한 곳으로 바꾸려면 무엇보다도 자비심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불교 국가인 스리랑카에서는 결혼식 전날 스님들을 집으로 초청해 축복의 의식을 올리는데, 이때 신랑 신부가 스님들과 함께 이 <자비경>을 암송합니다. 새롭게 인생의 길에 들어서는 젊은 두 사람이 의지할 교훈으로서 자비의 가르침을 주는 것입니다. 자비를 발하는 것이 이처럼 삶 속에서 실천되어야 합니다.

   자비의 ‘자(慈)’는 함께 기뻐한다는 뜻이고, ‘비(悲)’는 함께 신음한다는 뜻입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더불어 기뻐하고, 남의 고통을 그냥 바라보지 않고 더불어 신음합니다. 자비에는 함께 기뻐함과 함께 슬퍼함의 양면성이 있습니다.

   저는 20여 년 전 인도와 스리랑카, 태국, 인도네시아, 대만 등지를 순례한 적이 있습니다. 이 나라를 여행하는 내내 새삼 ‘종교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종교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그러다가 대만에서 며칠 묵으며 그곳 불자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삶을 통해 종교의 본질이 ‘자비의 실천’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추상적이고 막연하던 종교의 본질이 다름 아닌 자비의 실천임을 또다시 깨친 것입니다.

   그런데 자비의 실천은 혼자서는 불가능합니다. 만나는 대상을 통해서 자비가 실현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중생이 없으면 부처가 될 수 없습니다. 중생이 있기에 부처를 이루는 것입니다. 만나는 대상으로 인해 비로소 내 안에 잠들어 있는 자비의 움이 틉니다. 때문에 우리가 만나는 이웃은 나를 일깨워 주는 선지식(善知識 - 바른 도리를 가르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때그때 마주치는 타인을 통해서 나 자신이 활짝 열린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타인을 만나서도 마음이 열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평소에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행이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기도하고 참선하고 경전을 읽은 것은 바로 마음을 열기 위한 준비과정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가 할 일, 자신의 도리를 망각하지 않고 실현할 수 있습니다. 부처란 깨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24시간 늘 깨어 있는 존재가 바로 부처입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일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이 부처에 이르는 길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한 생각이 일어나 부처가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수많은 세월을 두고 순간순간 자비의 실천을 통해서, 다시 말해 부처의 행을 통해 부처를 이루는 것입니다.

   수행은 승려들만 하는 일이 아닙니다. 누구나 다 해야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일산의 삶 속에서 타인을 통해 내 마음을 쓰고 타인을 대하는 일 자체가 하나의 수행입니다. 수행은 닦는 행위입니다. 수행을 절에서나 하는 것으로, 또는 승려들만의 전유물로 착각해선 안 됩니다. 일상의 삶 자체가 수행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이든 수행으로 받아들이면 기분 나쁜 일이나 불행한 일도 참을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생겨납니다. 그런 의식으로 깨어 있지 않으면 대상에 늘 한눈팔게 됩니다.

   “일일일야 만사만생(一日一夜 萬死萬生), 하루 낮 하루 밤에 만 번 죽고 만 번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하루에도 수없이 생사를 거듭합니다. 수행을 하지 않아 깨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루하루의 삶 자체가 수행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수행을 통해서, 자비의 행을 통해서 인간이 성숙해집니다. 수많은 세월을 지나며 순간순간 새로워지고,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나 자신을 향상시킬 수 있어야 새롭게 눈이 열리고, 또한 세상을 맞이할 수 있는 기량이 갖추어집니다.

   해마다 부처님오신날이 되면 등 달고, 음악회도 열고, 이렇게 모여서 이야기도 듣고 합니다. 이것을 단순한 행사로 여기지 마십시오, 저도 오늘 여기 나오면서, ‘내가 오늘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할 것인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똑같은 되풀이, 그것은 지겹습니다. 언제나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오늘은 어제의 연장이 아닙니다. 새날입니다. 내일 일을 누가 압니까? 그날그날을 새날로 맞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일상에 찌들지 않고 나 자신이 새롭게 움틀 수 있습니다. 해마다 맞는 부처님오신날이지만 오늘 맞는 부처님오신날을 달라야 합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립니다. 삶 자체가 수행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실천을 통해서 거듭거듭 성숙해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지혜와 용기가 생겨서 휩쓸리지 않고 깨어 있는 정신으로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잠들기 전에 자기 삶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 나는 어떤 수행을 했는가? 오늘 하루, 타인에게 무엇을 베풀었는가? 내 인생의 금고에 어떤 것을 축적했는가?

   이렇게 점검한다면 하루하루의 삶이 결코 소홀해지지 않고 날마다 새로운 날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 성불하십시오.
 
2008. 5. 12. 부처님오신날
글출처 : 一期一會(법정스님 법문집)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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