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사이
도서명 | 오두막 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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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경제 연구소가 전국 3천 1백 8가구, 7천 4백 93명을 조사 대상으로 고정시켜, 지난 93년부터 매년 가구당 경제활동을 조사하여 최근 그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특히 도시 지역에서는 이웃과의 단절현상이 두드러져서 주민의 절반 정도가 하루에 한 번도 이웃과 접촉 없이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이웃과 마주치더라도 인사는커녕 얼굴을 돌리며 외면하기 일쑤다. 이게 우리 시대의 차디찬 무표정한 세태이다.
바로 이웃에 살면서도 벽과 담으로 갈라놓은 주거형태가 사람한테서 인사와 표정을 앗아간 것이다. 굳이 이런 조사보고가 아니더라도, 오늘날 우리들은 도시나 농어촌을 가릴 것 없이 따뜻하고 정다운 인간적인 속성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날이 갈수록 사람과 사람 사이가 멀어져만 간다.
다른 한편, 자주 만나 이야기하면서도 그저 건성으로 스치고 지나가는 일은 없는가. 가족 사이가 됐건 혹은 친구 사이가 됐건 너무 자주 만나기 때문에 으레 당연하게 여기고 범속해지는 일은 없는가. 일이 있건 없건 걸핏하면 습관적으로 전화를 걸고, ‘띵동’ 하고 찾아가는 것도 우정의 밀도에 어떤 몫을 할 것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무료하고 심심하니까 그저 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해서 친구를 찾는다면 그건 ‘우정’일 수 없다. 시간을 죽이기 위해 찾는 친구는 좋은 친구가 아니다. 시간을 살리기 위해 만나는 친구야말로 믿을 수 있는 좋은 친구 사이다.
친구 사이의 만남에는 서로 영혼의 메아리를 주고받을 수 있어야 한다. 너무 자주 만나게 되면 상호간에 그 무게를 축적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마음의 그림자처럼 함께할 수 있는 그런 사이가 좋은 친구일 것이다. 만남에는 그리움이 따라야 한다. 그리움을 따르지 않는 만남은 이내 시들해지게 마련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기쁜 일이 있을 때, 혹은 가장 고통스러울 때, 그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그런 사이가 좋은 인간관계다.
진정한 친구란 두 개의 육체에 깃들인 하나의 영혼이란 말이 있다. 그런 친구 사이는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을지라도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지척에 살면서도 일체감을 함께 누릴 수 없다면 그건 진정한 친구일 수 없다.
사랑이 맹목적일 때, 즉 사랑이 한 존재의 전체를 보지 못하는 동안에는 관계의 근원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 옛말은, 세월의 여과 과정을 거치면 관계의 실상이 이내 드러나게 된다는 소리다. 인간관계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예절과 신의는 어느 한때만 가지고는 헤아릴 수 없다 .시간이 지나가면 그 사람의 본바탕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아무리 그럴듯하게 생긴 상대일지라도 속에 든 것이 바닥나 버리거나 신의가 없으면 번데기처럼 시시한 대상이 되고 만다. 그러나 지극히 평범한 상대일지라도 어느 날 문득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로 있는 일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그가 새롭게 돋보인다.
진정한 만남은 상호간의 눈뜸(開眼)이다. 영혼의 진동이 없으면 그건 만남이 아니라 한때의 마주침이다. 그런 만남을 우해서는 자기 자신을 끝없이 가꾸고 다스려야 한다. 좋은 친구를 만나려면 먼저 나 자신이 좋은 친구감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찬구란 내 부름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말도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런 시구(詩句)가 있다.
인간관계에서 권태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늘 함께 있으면서 부딪친다고 해서 생기는 것만은 아니다. 창조적인 노력을 기울여 변화를 가져오지 않고, 그저 맨날 비슷비슷하게 되풀이되는 습관적인 일상의 반복에서 삶에 녹이 스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가꾸고 다듬는 일도 무시될 수 없지만, 자신의 삶에 녹이 슬지 않도록 늘 깨어 있으면서 안으로 헤아리고 높이는 일에 보다 근본적인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생각과 영혼에 공감대가 없으면 인간관계가 투명하고 살뜰해질 수 없다. 따라서 공통적인 지적 관심사가 전제되어야 한다. 모처럼 친구끼리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공통적인 지적 관심사가 없기 때문에 만남 자체가 빛을 잃은 일이 얼마나 많은가. 끊임없이 참구하는 사람만이 지적 관심사를 지닐 수 있다.
사람은 저마다 따로따로 자기 세계를 가꾸면서도 공유(共有)하는 만남이 있어야 한다. 칼릴 지브란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 가락에 떨면서도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거문고 줄처럼’ 그런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거문고 줄은 서로 떨어져 있기 때문에 울리는 것이지, 함께 붙어 있으면 소리를 낼 수 없다. 공유하는 영역이 넓지 않을수록 깊고 진하고 두터워진다. 공유하는 영역이 너무 넓으면 다시 범속에 떨어진다.
행복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절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생각이나 행동에 있어서 지나친 것은 행복을 침식한다. 사람끼리 만나는 일에도 이런 절제가 있어야 한다.
행복이란 말 자체가 사랑이란 표현처럼 범속으로 전락된 세태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행복이란, 가슴속에 사랑을 채움으로써 오는 것이고, 신뢰와 희망으로부터 오고,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데서 움이 튼다.
그러니 따뜻한 마음이 고였을 때, 그리움이 가득 넘치려고 할 때, 영혼의 향기가 배어 있을 때 친구도 만나야 한다. 습관적으로 만나면 우정도 행복도 쌓이지 않는다.
혹시 이런 경험은 없는가.
텃밭에서 이슬이 내려앉은 애호박을 보았을 때, 친구한테 따서 보내주고 싶은 그런 생각 말이다. 혹은 들길이나 산길을 거닐다가 청초하게 피어 있는 들꽃과 마주쳤을 때, 그 아름다움의 설레임을 친구에게 전해주고 싶은 그런 경험은 없는가.
이런 마음을 지닌 사람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영혼의 그림자처럼 함께할 수 있어 좋은 친구일 것이다. 좋은 친구는 인생에서 가장 큰 보배이다. 친구를 통해서 삶의 바탕을 가꾸라.
글출처 : 오두막 편지(法頂 스님, 이레) 中에서......
특히 도시 지역에서는 이웃과의 단절현상이 두드러져서 주민의 절반 정도가 하루에 한 번도 이웃과 접촉 없이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이웃과 마주치더라도 인사는커녕 얼굴을 돌리며 외면하기 일쑤다. 이게 우리 시대의 차디찬 무표정한 세태이다.
바로 이웃에 살면서도 벽과 담으로 갈라놓은 주거형태가 사람한테서 인사와 표정을 앗아간 것이다. 굳이 이런 조사보고가 아니더라도, 오늘날 우리들은 도시나 농어촌을 가릴 것 없이 따뜻하고 정다운 인간적인 속성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날이 갈수록 사람과 사람 사이가 멀어져만 간다.
다른 한편, 자주 만나 이야기하면서도 그저 건성으로 스치고 지나가는 일은 없는가. 가족 사이가 됐건 혹은 친구 사이가 됐건 너무 자주 만나기 때문에 으레 당연하게 여기고 범속해지는 일은 없는가. 일이 있건 없건 걸핏하면 습관적으로 전화를 걸고, ‘띵동’ 하고 찾아가는 것도 우정의 밀도에 어떤 몫을 할 것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무료하고 심심하니까 그저 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해서 친구를 찾는다면 그건 ‘우정’일 수 없다. 시간을 죽이기 위해 찾는 친구는 좋은 친구가 아니다. 시간을 살리기 위해 만나는 친구야말로 믿을 수 있는 좋은 친구 사이다.
친구 사이의 만남에는 서로 영혼의 메아리를 주고받을 수 있어야 한다. 너무 자주 만나게 되면 상호간에 그 무게를 축적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마음의 그림자처럼 함께할 수 있는 그런 사이가 좋은 친구일 것이다. 만남에는 그리움이 따라야 한다. 그리움을 따르지 않는 만남은 이내 시들해지게 마련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기쁜 일이 있을 때, 혹은 가장 고통스러울 때, 그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그런 사이가 좋은 인간관계다.
진정한 친구란 두 개의 육체에 깃들인 하나의 영혼이란 말이 있다. 그런 친구 사이는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을지라도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지척에 살면서도 일체감을 함께 누릴 수 없다면 그건 진정한 친구일 수 없다.
사랑이 맹목적일 때, 즉 사랑이 한 존재의 전체를 보지 못하는 동안에는 관계의 근원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 옛말은, 세월의 여과 과정을 거치면 관계의 실상이 이내 드러나게 된다는 소리다. 인간관계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예절과 신의는 어느 한때만 가지고는 헤아릴 수 없다 .시간이 지나가면 그 사람의 본바탕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아무리 그럴듯하게 생긴 상대일지라도 속에 든 것이 바닥나 버리거나 신의가 없으면 번데기처럼 시시한 대상이 되고 만다. 그러나 지극히 평범한 상대일지라도 어느 날 문득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로 있는 일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그가 새롭게 돋보인다.
진정한 만남은 상호간의 눈뜸(開眼)이다. 영혼의 진동이 없으면 그건 만남이 아니라 한때의 마주침이다. 그런 만남을 우해서는 자기 자신을 끝없이 가꾸고 다스려야 한다. 좋은 친구를 만나려면 먼저 나 자신이 좋은 친구감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찬구란 내 부름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말도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런 시구(詩句)가 있다.
사람이 하늘처럼 맑아 보일 때가 있다.사람한테서 하늘 냄새를 맡아본 적이 있는가. 스스로 하늘 냄새를 지닌 사람만이 그런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나는 그 사람에게서
하늘 냄새를 맡는다······.
인간관계에서 권태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늘 함께 있으면서 부딪친다고 해서 생기는 것만은 아니다. 창조적인 노력을 기울여 변화를 가져오지 않고, 그저 맨날 비슷비슷하게 되풀이되는 습관적인 일상의 반복에서 삶에 녹이 스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가꾸고 다듬는 일도 무시될 수 없지만, 자신의 삶에 녹이 슬지 않도록 늘 깨어 있으면서 안으로 헤아리고 높이는 일에 보다 근본적인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생각과 영혼에 공감대가 없으면 인간관계가 투명하고 살뜰해질 수 없다. 따라서 공통적인 지적 관심사가 전제되어야 한다. 모처럼 친구끼리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공통적인 지적 관심사가 없기 때문에 만남 자체가 빛을 잃은 일이 얼마나 많은가. 끊임없이 참구하는 사람만이 지적 관심사를 지닐 수 있다.
사람은 저마다 따로따로 자기 세계를 가꾸면서도 공유(共有)하는 만남이 있어야 한다. 칼릴 지브란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 가락에 떨면서도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거문고 줄처럼’ 그런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거문고 줄은 서로 떨어져 있기 때문에 울리는 것이지, 함께 붙어 있으면 소리를 낼 수 없다. 공유하는 영역이 넓지 않을수록 깊고 진하고 두터워진다. 공유하는 영역이 너무 넓으면 다시 범속에 떨어진다.
행복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절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생각이나 행동에 있어서 지나친 것은 행복을 침식한다. 사람끼리 만나는 일에도 이런 절제가 있어야 한다.
행복이란 말 자체가 사랑이란 표현처럼 범속으로 전락된 세태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행복이란, 가슴속에 사랑을 채움으로써 오는 것이고, 신뢰와 희망으로부터 오고,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데서 움이 튼다.
그러니 따뜻한 마음이 고였을 때, 그리움이 가득 넘치려고 할 때, 영혼의 향기가 배어 있을 때 친구도 만나야 한다. 습관적으로 만나면 우정도 행복도 쌓이지 않는다.
혹시 이런 경험은 없는가.
텃밭에서 이슬이 내려앉은 애호박을 보았을 때, 친구한테 따서 보내주고 싶은 그런 생각 말이다. 혹은 들길이나 산길을 거닐다가 청초하게 피어 있는 들꽃과 마주쳤을 때, 그 아름다움의 설레임을 친구에게 전해주고 싶은 그런 경험은 없는가.
이런 마음을 지닌 사람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영혼의 그림자처럼 함께할 수 있어 좋은 친구일 것이다. 좋은 친구는 인생에서 가장 큰 보배이다. 친구를 통해서 삶의 바탕을 가꾸라.
글출처 : 오두막 편지(法頂 스님, 이레)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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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올리면서 요즈음 우리 홈의 분위기가 어쩜 이리도 닮았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있어야 할 정이 얇아져가는 듯한 그러한 분위기는
비단 저만이 느끼는 감정일 지 모릅니다.
우리의 만남에는 '그리움'이라는 것이 있는 것인지.
우리가 습관적으로 드나드는 홈 공간에서 만남이 아닌 '마주침'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러한 것이 저 혼자 느껴지는 기우이기를 빌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