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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없는 소리

오작교 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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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서 있는 사람들

    누가 찾아오지만 않으면 하루 종일 가야 나는 말할 일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새삼스럽게 외롭다거나 적적함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그저 넉넉하고 천연스러울 뿐. 홀로 있으면 비로소 내 귀가 열리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듣는다. 새소리를 듣고 바람소리를 듣고 토끼나 노루가 푸석거리면서 지나가는 소리를 듣는다. 꽃피는 소리를, 시드는 소리를, 지는 소리를, 그리고 때로는 세월이 고개를 넘으면서 한숨 쉬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므로 듣는다는 것은 곧 내 내면의 뜰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낯선 사람들을 만나 말대꾸를 하고 난 후면 허전하기 이를 데 없다. 목젖까지 찰랑찰랑 고였던 맑은 말들이 어디론지 새어버린 것 같기만 하다. 지난여름에도 아랫절에 내려가 수련을 하는 학생들한테 서너 시간 지껄이고 났더니, 올라오는 길에는 몹시 허전해서 후회한 적이 있다. 소리 내어 말하기보다는 듣는 일이 얼마나 현명한 태도인가를 거듭거듭 확인할 수 있었다.

   미카엘 엔데의 동화 <모모>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마을 사람들은 무슨 일이 생기면 폐허가 되어버린 원형극장으로 고아 소녀인 모모를 찾아간다. 그들은 모든 것을 그 어린 소녀에게 털어놓는다. 다만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들어줄 뿐인데, 방황하는 사람들은 정착을, 나약한 사람들은 용기를 갖게 되고, 불행한 사람과 억눌린 사람들은 신념과 기쁨을 느끼게 된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눈을 떴던 것이다.

   오늘 우리들은 되는 소리건 안 된 소리건 간에 쏟아버리기를 좋아한다. 그러면서도 남의 말에 차분히 귀기울이려고는 하지 않는다.

   다들 성이 급해서 듣고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TV 앞에서처럼 얌전히 앉아 들을 줄을 모른다.

   귀 기울여 듣는다는 것은 침묵을 익힌다는 말이기도 하다. 침묵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자기 내면의 바다.

   말은, 진실한 말은 내면의 바다에서 자란다. 자기 언어를 갖지 못하고 남의 말만을 열심히 흉내 내는 오늘의 우리는 무엇인가.

   다시 모모의 이야기.

   별들이(어떤 사물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우리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친구들한테 전하려면, 그것에 필요한 말이 우리 안에서 우선 자라야 한다. 즉 기다림의 인내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씨앗처럼 기다리는 거야. 움이 돋아나기까지 땅속에 묻혀 잠자는 씨앗처럼.’

   현대인들은 기다릴 만한 시간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시간을 적절하게 쓸 줄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택시를 잡기 위해 줄지어 서 있으면서도 그 시간을 유효하게 쓰지 못하고 흘려버리기 일쑤이다. 자기 생명의 순간들을 아무렇게나 흩어버린다. 그러면서도 입버릇처럼 ‘시간이 없어서’, ‘그럴 여가가 없어서’라고 한다.

   시간의 주재자 호라 박사가 모모에게 들려준 이야기.

   ‘시간은 참된 소유자를 떠나면 죽은 시간이 되고 말아. 왜냐면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시간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 그래서 이것이 참으로 자신의 시간일 때에만 그 시간은 생명을 갖게 되는 거란다.’

   열린 귀는 들으리라.

   한때 무성하던 것이 져버리고 만 이 가을의 텅 빈 들녘에서 끝없이 밀려드는 소리 없는 소리를. 자기 시간의 꽃들을.

<1977 . 12>


글출처 : 서 있는 사람들(法頂 스님, 샘터)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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