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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ㅏ 아래에 서면

오작교 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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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서 있는 사람들
   그늘을 짙게 드리우고 있는 정정한 나무 아래 서면 사람이 초라해진다. 수목(樹木)이 지니고 있는 그 질서와 겸허와 자연에의 순응을 보고 있노라면 문득 부끄러워진다. 사람은 나무한테서 배울게 참으로 많은 것 같다.

   폭풍우가 휘몰아치던 날, 가지 끝에서 재잘거리던 새들은 안전한 곳을 찾아 어디론지 모두 날아가 버렸다. 그런 날 사람들은 저마다 덧문을 굳게 닫고 휘장을 내린다. 섬돌 위에 신발이 젖을까 봐 안으로 들여놓는다. 이때 나무들은 제자리에 선 체 폭풍우를 맞이한다. 더러는 가지를 찢기면서 잎을 떨치면서 묵묵히 순응하고 있다. 의연한 그 모습에 우리는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비가 내리는 길목마다 비닐우산이 걸어간다. 저마다 자기 우산아래서 우울하게 걸어간다. 한 사람쯤 자기 산하(傘下)에 들여 빗길을 함께 걸을 만도 한데, 자신의 어깨조차 가릴 수 없도록 시정(市井)의 우산은 비좁다. 그만큼 인간의 영역이 인색해진 것이다. 이것이 오늘 이 땅의 우리인가.

   도시의 과밀(過密) 현상은 육신의 그림자를 밟힐 뿐 아니라, 마음의 그림자마저 앗기게 하고 있다. 기댈 만한 곳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다. 가지에 둥지를 치게 하여 새들을 받아들이고, 서늘한 그늘을 드리워 그 아래 수백 명을 포용할 수 있는 나무를 대하면 이래서 우리는 초라하고 부끄러운 것이다.

   합천 해인사에는 신라의 선비 최치원(崔致遠)이 노닐었다는 학사대(學士臺)가 있다. 거기에는 수백 년 묵은 몇 아름드리 전나무가 한 그루 초연히 허공에 솟아 있다. 그런데 그 거목(巨木)의 밑동, 사람의 손이 닿을 만한 곳에는 어느 한 군데 성한 곳이 없이 온몸에 상처투성이다. 구경꾼들이 자기네 이름을 새기느라 칼질을 해놓았기 때문이다. 자기네는 그저 늙기도 서럽다고 하면서 어째서 늙은 나무에다는 상처를 입히는 것일까. 나무에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그 나무의 허물이라면 무더운 여름날 서늘한 그늘을 대지(大地)에 내리고, 더러는 바람과 더불어 덧없는 세월을 노래한 그 허물밖에 없거늘.

   하잘것없는 이름 석 자 아무개. 사람들은 그걸 내세우느라 그다지도 극성을 떨지만, 그 건너 있는 8만도 넘는 대장경판 어느 모서리를 보아도 그러한 흔적은 없다. 누가 글씨를 쓰고 어느 손으로 새겼는지 전혀 아무 자취도 남기지 않았다. 그저 판에다 쓸 말만을 새겼을 뿐이다. 옛사람들은 그처럼 겸허했다. 우리 조상들은 그와 같이 어질었던 것이다. 상처를 입은 나무 아래 서면 이래서 사람인 내가 초라하고 부끄러워진다.

   대개의 사람들은 숲이나 나무 그늘에 들면 착해지려고 한다. 콘크리트 벽 속이나 아스팔트위에서는 곧잘 하던 거짓말도, 선하디 선하게 서 있는 나무 아래서는 차마 할 수가 없다. 차분해진 음성으로 영원한 기쁨을 이야기하고, 무엇이 선(善)이고 진리인가를 헤아리게 된다. 소음의 틈바구니에서 분주히 뛰어다니고 있는 일상의 자신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인간의 배경은 소음과 티끌에 싸여 피곤하기만 한 문명일 수 없다. 나무와 새와 물과 구름, 그리고 별들이 수놓인 의연한 자연임을 알 수 있다. 인류사회에 횃불을 밝힌 위대한 종교와 사상이 콘크리트로 된 벽 속에서가 아니라 그윽한 대자연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사람이 자연을 정복하겠다니 될 말인가. 사람은 자연으로부터 그 질서와 겸허와 미덕을 배워야 할 일이다.
<1973 . 7>

글출처 : 서 있는 사람들(法頂 스님, 샘터)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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