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고장에서
도서명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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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눈에 갇혀 바깥출입을 못하고 있다. 남쪽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무지무지하게 눈이 내리고, 내리는 양만큼 그대로 쌓인다. 눈 구경이란 한가한 사람들이 할 일이고, 눈 속에 묻혀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불편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길이 막히니 나갈 수도 없고 또한 돌아올 수도 없다. 허리께나 어깨 높이로 쌓인 눈을 뚫고 나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나무들도 잔뜩 눈을 뒤집어쓰고 있다. 이따금 바람이 지나가면 나무에 쌓인 눈이 부옇게 눈보라를 일으키며 무너져 내린다. 눈 쌓인 산은 온통 깊은 침묵 속에 잠겨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시냇물만은 두터운 얼음장 속에서 쉬지 않고 흐른다. 세월이 잠시도 멈추지 않고 어디론지 사라져가듯이. 얼음장 속으로 차갑게 흐르는 한겨울의 이 시냇물소리는 듣는 마음을 오히려 따뜻하게 한다.
요즘 나는 고립(孤立)이라는 말을 이모저모로 생각한다. 어떤 상황에서건 외부와의 소통이 단절되면 공간적으로는 그대로 고립상태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여유 있는 자신의 의식세계를 지닌 사람들에게는 설사 외떨어진 섬에서 산다 할지라도 고립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자신의 세계가 구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독과 고립은 비슷한 말 같지만 엄밀히 살펴보면 전혀 다른 정신상태다. 고독은 좋은 것이지만 고립은 좋은 것이 못 된다.
고독은 때때로 사람의 영혼을 맑힌다. 고독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은 그만큼 무디어 있거나 자신의 삶에 무감각하다. 고립은 말 그대로 이웃과 어울리지 못하고 외톨이로 처진 상태를 가리킨다.
여럿이서 복잡하게 얽히어 살아가는 직장이나 아파트단지 같은 데서, 공간적으로는 이웃과 함께 있으면서도 실제적으로는 고립된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고립은 좋지 않은 것이다. 그 고립은 소외감을 동반하기 때문에 건전한 정서를 이룰 수 없다.
눈 고장에서 이 겨울을 나면서 문득문득 생각하는 것은, 문화가 형성되는 데는 인문사회적인 환경에 못지않게 자연환경의 영향이 크겠다는 느낌이다. 살기 불편하고 교통 통신이 두절된 상태에서 창조의 자극이 없으면 생동하는 세계로부터 고립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가 또 다른 입장에서 오늘날 우리들의 삶을 되돌아볼 때, 닳아지고 지쳐 시들한 일상의 범속한 삶에서 벗어나려면 외부세계와 단절된 불편한 자연환경이 도리어 새로운 출구를 열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편리한 것에만 너무 길들여졌다. 그래서 조금만 불편해도 그걸 참으며 이겨내지 못한다. 그만큼 나약해져서 의지력과 창의력이 시들어진 것이다. 때로는 불편한 환경에 자신을 투신해 봄으로써 잠재된 의지력과 창의력이 움터 나와 삶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도 있다.
우리들의 인생이란 누구를 막론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새로운 실험과 시도를 통해서 그 가능성을 꽃피울 수 있어야 한다.
고려시대 원감 충지 스님의 글이다. 나는 요즘 이 시를 자주 음미하고 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음식을 먹는 수가 잇다. 배가 고프지 않으면서도 밥을 먹고, 잠이 오지 않는 데도 억지로 잠을 자려고 한다. 그밖에 다른 일도 전혀 마음에는 없는데 습관적으로 그 일에 손을 댄다. 이렇게 되면 그의 삶은 자연의 리듬을 거스르게 된다.
뱃속이 출출하고 시장기가 들었을 때 먹는 음식은 그 맛이 얼마나 좋은지 누구나 겪어서 익히 알고 있다. 또한 음식에 대한 고마움을 알게 되니, 먹다 남았다고 해서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 배가 고프지 않으면서도 습관적으로 먹거나 억지로 먹기 때문에 소화기에 이상이 생기고 음식 맛을 모르며 버리는 것을 아깝거나 죄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이래서 자신 앞에 쌓인 복을ㄹ 스스로 덜어내고 있는 것이다.
차는 공복에 마셔야 그 향기와 맛을 알 수 있다. 나는 올 겨울 들어 새벽으로 차를 마시고 있다. 새벽예불을 드리고 나서 좌선 끝에, 다기를 내놓고 차관에 물을 끓여 여명의 창 아래서 차를 두어 모금 마시고 있으면, 이 오두막의 생활에 잔잔한 즐거움이 피어오른다. 흔히 우리는 차를 잔 가득 부어 습관적으로 마시는데, 잔의 3분의 1이나 4분의 1쯤만 따라 두어 모금 음미해 보아야 차의 고마움과 그 진미를 알 수 있다. 공복에 마시는 차는 우리 영혼을 맑게 한다. 이 산중에서 음미할 차가 없다면 내 삶은 국이 없는 맨밥이 되고 말 것이다.
사람들에게 시달린 나는 이 산중에 들어와 살게 되면서 무엇보다도 불쑥불쑥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좋다. 내 얼굴 표정에 어떤 변화가 있다면, 짜증스러워하던 그 그림자가 사라져서일 것이다. 위에 든 시에서 ‘외떨어져 사니 문 두드리는 사람 없고’라는 구절이 나는 가장 마음에 든다.
이 오두막에는 작은 내 원불(願佛)이 모셔져 있다. 불단에 향을 사르면서 예불을 드리고 좌선을 하고 글을 읽고 혹은 쓴다. 그러면서 불법을 만나 출가 수행승이 된 인연에 늘 고마워한다. 말하자면 부처님 같은 어른의 빽이 있으니 다행하고 든든하다.
우선 길이 막히니 나갈 수도 없고 또한 돌아올 수도 없다. 허리께나 어깨 높이로 쌓인 눈을 뚫고 나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나무들도 잔뜩 눈을 뒤집어쓰고 있다. 이따금 바람이 지나가면 나무에 쌓인 눈이 부옇게 눈보라를 일으키며 무너져 내린다. 눈 쌓인 산은 온통 깊은 침묵 속에 잠겨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시냇물만은 두터운 얼음장 속에서 쉬지 않고 흐른다. 세월이 잠시도 멈추지 않고 어디론지 사라져가듯이. 얼음장 속으로 차갑게 흐르는 한겨울의 이 시냇물소리는 듣는 마음을 오히려 따뜻하게 한다.
요즘 나는 고립(孤立)이라는 말을 이모저모로 생각한다. 어떤 상황에서건 외부와의 소통이 단절되면 공간적으로는 그대로 고립상태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여유 있는 자신의 의식세계를 지닌 사람들에게는 설사 외떨어진 섬에서 산다 할지라도 고립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자신의 세계가 구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독과 고립은 비슷한 말 같지만 엄밀히 살펴보면 전혀 다른 정신상태다. 고독은 좋은 것이지만 고립은 좋은 것이 못 된다.
고독은 때때로 사람의 영혼을 맑힌다. 고독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은 그만큼 무디어 있거나 자신의 삶에 무감각하다. 고립은 말 그대로 이웃과 어울리지 못하고 외톨이로 처진 상태를 가리킨다.
여럿이서 복잡하게 얽히어 살아가는 직장이나 아파트단지 같은 데서, 공간적으로는 이웃과 함께 있으면서도 실제적으로는 고립된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고립은 좋지 않은 것이다. 그 고립은 소외감을 동반하기 때문에 건전한 정서를 이룰 수 없다.
눈 고장에서 이 겨울을 나면서 문득문득 생각하는 것은, 문화가 형성되는 데는 인문사회적인 환경에 못지않게 자연환경의 영향이 크겠다는 느낌이다. 살기 불편하고 교통 통신이 두절된 상태에서 창조의 자극이 없으면 생동하는 세계로부터 고립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가 또 다른 입장에서 오늘날 우리들의 삶을 되돌아볼 때, 닳아지고 지쳐 시들한 일상의 범속한 삶에서 벗어나려면 외부세계와 단절된 불편한 자연환경이 도리어 새로운 출구를 열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편리한 것에만 너무 길들여졌다. 그래서 조금만 불편해도 그걸 참으며 이겨내지 못한다. 그만큼 나약해져서 의지력과 창의력이 시들어진 것이다. 때로는 불편한 환경에 자신을 투신해 봄으로써 잠재된 의지력과 창의력이 움터 나와 삶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도 있다.
우리들의 인생이란 누구를 막론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새로운 실험과 시도를 통해서 그 가능성을 꽃피울 수 있어야 한다.
배고파 밥을 먹으니
밥맛이 좋고
자고 일어나 차를 마시니
그 맛이 더욱 향기롭다
외떨어져 사니
문 두드리는 사람 없고
빈집에 부처님과 함께 지내니
근심 걱정이 없네.
밥맛이 좋고
자고 일어나 차를 마시니
그 맛이 더욱 향기롭다
외떨어져 사니
문 두드리는 사람 없고
빈집에 부처님과 함께 지내니
근심 걱정이 없네.
고려시대 원감 충지 스님의 글이다. 나는 요즘 이 시를 자주 음미하고 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음식을 먹는 수가 잇다. 배가 고프지 않으면서도 밥을 먹고, 잠이 오지 않는 데도 억지로 잠을 자려고 한다. 그밖에 다른 일도 전혀 마음에는 없는데 습관적으로 그 일에 손을 댄다. 이렇게 되면 그의 삶은 자연의 리듬을 거스르게 된다.
뱃속이 출출하고 시장기가 들었을 때 먹는 음식은 그 맛이 얼마나 좋은지 누구나 겪어서 익히 알고 있다. 또한 음식에 대한 고마움을 알게 되니, 먹다 남았다고 해서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 배가 고프지 않으면서도 습관적으로 먹거나 억지로 먹기 때문에 소화기에 이상이 생기고 음식 맛을 모르며 버리는 것을 아깝거나 죄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이래서 자신 앞에 쌓인 복을ㄹ 스스로 덜어내고 있는 것이다.
차는 공복에 마셔야 그 향기와 맛을 알 수 있다. 나는 올 겨울 들어 새벽으로 차를 마시고 있다. 새벽예불을 드리고 나서 좌선 끝에, 다기를 내놓고 차관에 물을 끓여 여명의 창 아래서 차를 두어 모금 마시고 있으면, 이 오두막의 생활에 잔잔한 즐거움이 피어오른다. 흔히 우리는 차를 잔 가득 부어 습관적으로 마시는데, 잔의 3분의 1이나 4분의 1쯤만 따라 두어 모금 음미해 보아야 차의 고마움과 그 진미를 알 수 있다. 공복에 마시는 차는 우리 영혼을 맑게 한다. 이 산중에서 음미할 차가 없다면 내 삶은 국이 없는 맨밥이 되고 말 것이다.
사람들에게 시달린 나는 이 산중에 들어와 살게 되면서 무엇보다도 불쑥불쑥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좋다. 내 얼굴 표정에 어떤 변화가 있다면, 짜증스러워하던 그 그림자가 사라져서일 것이다. 위에 든 시에서 ‘외떨어져 사니 문 두드리는 사람 없고’라는 구절이 나는 가장 마음에 든다.
이 오두막에는 작은 내 원불(願佛)이 모셔져 있다. 불단에 향을 사르면서 예불을 드리고 좌선을 하고 글을 읽고 혹은 쓴다. 그러면서 불법을 만나 출가 수행승이 된 인연에 늘 고마워한다. 말하자면 부처님 같은 어른의 빽이 있으니 다행하고 든든하다.
1993. 2
글출처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법정스님, 샘터) 中에서......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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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년의 직장생활을 마무리하고 며칠 집에서 쉬고 있자니
문득 나도 고립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스님 말씀처럼 문두드리는 이가 없어서 좋아야 할텐데,
그저 찾아주는 이가 없어 서운할 따름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