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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茶) 이야기

오작교 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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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요 며칠 동안 내 산거(山居)에는 사나운 풍신(風神)이 내려와 둘레를 온통 할퀴고 갔다. 그 바람에 산죽(山竹)을 엮어 덮어 놓은 뒷간의 이엉이 벗겨져 흩어졌다. 또 일거리를 장만해 주고 간 것이다.

   바람도 산들바람은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고 느긋하게 하는데, 거센 바람과 삭풍은 우리 마음을 움츠러들게 하고 거칠게 만든다. 돌이켜보니, 내가 이 오두막에 와 살면서 말씨가 거칠어진 것 같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더니 빈말이 아닌 모양이다.

   오고 가는 길에서 무례하고 몰염치한 운전자들 때문에 그때마다 내 입이 걸어지고, 골짜기를 할퀴며 휘몰아치는 바람이 때로는 아궁이에 군불을 지필 수 없도록 하기 때문에 화가 난다. 하지만 어쩌랴. 바람은 바람대로 뜻이 있어서 불어댈 것이다. 자연은 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참고 견디는 것이 정진이라고 했으니 참고 견딜 수밖에 없다. 마음이 평정을 이룰 때 밖에서 불어대는 바람도 잠잠해진다.

   자연현상은 우리들 마음이 나타난 바라고 한다. 그뿐 아니라 그대로가 우리 마음이라고도 한다. 그래서'삼계유심(三界唯心)' 이란 말이 있다. 삼계란 욕망과 물질과 정신의 세계, 즉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이다.

   요즘에 들어 지구 곳곳에서 지진과 홍수와 폭설과 가뭄 등 자연의 재난이 끊이지 않는 것도, 헤아려보면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저질러 불러들인 재앙일 것 같다. 사람이 자연의 지배자가 아니라 그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이런 재앙은 줄어들 것이다.

   '얼굴에 내리는 비' 라고 불리는 한 인디언은 침략자인 백인들을 향해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당신들은 이 땅에 와서 이 대지 위에 무엇을 세우려고 하는가? 어떤 꿈을 당신들의 아이들에게 들려주는가? 내가 보기에 당신들은 그저 땅을 파헤치고 건물을 세우고 나무들을 쓰러뜨릴 뿐이다. 그래서 행복한가? 강가에서 연어 떼를 바라보며 다가올 겨울의 행복을 예상하는 우리만큼 행복한가?"

   그는 이런 말도 하고 있다.

   "이 땅에서 들짐승들이 사라진다면 인간이란 것도 무슨 의미가 있는가? 들짐승들이 저 어두운 기억의 그늘속으로 모두 사라지고 나면 인간은 깊은 고독감 때문에 말라 죽고 말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 짐승한테 일어나는 일은 똑같이 인간에게도 일어난다."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 낸 오늘의 문명에 어떻게 삶의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인지 암담하다. 항상 크고 많고 빠른 것과 새것만을 추구하는 현대인들, 주어진 것에 만족할 줄도 감사할 줄도 모르면서 소모적이고 향락적인 우리들. 생명과 자연을 끝없이 파괴하고 자원을 낭비하면서 단 하나뿐인 삶의 터전인 고마운 이 지구를 거대한 쓰레기장으로 만들어 가는 오늘의 문명에 더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소유에 집착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큰 질병이요 약점인데, 오늘날 우리들은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를 가릴것 없이 삶의 목표를 보다 더 많이 소유하는 데 두고 있다. 이 끝없는 야망 때문에 인간이 병들어 간다.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이란 어디에 있는가. 향기로운 한 잔의 차를 통해서도 누릴 수 있고, 난롯가에서 읽는 책에도 그 행복은 깃들여 있다. 눈 속에 피어 있는 한 가지 매화나 동백꽃에도 행복은 스며 있다. 개울물소리처럼 지극히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만 지닐 수 있다면, 우리가 누리고자 하는 그 맑고 향기로운 삶은 어디에나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그 그릇에 알맞은 행복을 누릴 수 있다. 당신의 그릇은 어떤 그릇인가?

   얼마 전 부산에 계시는 금당(錦堂) 최규용(崔圭用) 옹으로부터 소포를 하나 전해 받았다. 저서인 <중국차문화기행(中國茶文化紀行)>과 용정차 한 통과 서찰이 들어 있었다. 올해 아흔세 살인 노인께서 손수 붓으로 쓰신 고졸(古拙)한 서체와 사연이 몇 번이고 되읽게 했다.

   지난해 11월 하순 내가 참여하고 있는 한 모임의 일로 부산에 갔을 때 시민회관에서 옹을 뵈었었다. 예전이나 다름없이 정정하셨다. 전에 마셨던 차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한 통 보내 주마고 하셨다. 그 후 나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신문에서 내 칼럼을 보시고 그때의 일을 상기하셨는지 언약을 이행하신 것이다.

   ‘(앞에 인사말 생략) 지난날 부산시민회관 내강시(來講時) 용정차(龍井茶)와 졸저(拙著) 이제야 상송(上送)합니다. 차일피일(此日彼日)하다 보니 언질(言質)을 어겼습니다.

   구삼노령(九三老齡)이니 오전에는 신선(神仙)이고 오후에는 귀신(鬼神)이 됩니다.

   일월 이십모일(一月二某日) 금당(錦堂) 다취(茶醉) 합장(合掌).‘ "아흔셋 노령이라 오전에는 신선이고 오후에는 귀신이 된다."는 이 표현이 가슴에 와 박히었다. 누구나 사람은 육신의 나이를 먹게 마련이다. 나이를 먹게 되면 대개의 경우 몸과 정신이 함께 쇠락해져서 사는 일 자체가 짐스럽고 시들해질 듯싶은데, 금당옹께서는 이름그대로 찬란한 말년을 누리고 계신 것 같다. 당신이 하신 언약을 어기지 않고 귀찮은 소포까지 손수 꾸려 보내신 그 신의에 감격할 따름이다.

   평생 차를 좋아하고 차에 대한 저술과 번역을 하여 동호인들에게 차의 덕을 나누는 일을 즐기면서 말년을 정정하게 보내고 계신 듯싶다. 중국과 국교가 열리기 전 1989년 가을에 차의 원류를 찾아 고령으로 불편한 여행을 단행한 그 기상과 의지는 젊은 후배들로도 감히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중국차문화기행>을 보면 차의 성인으로 추앙되는 육우의 고향에서 국제차회에 참석하고, 멀리 운남성 곤명 - 베트남과 미얀마와의 국경에 인접한 곳 - 에까지 가서 수령 8백 년이 된 차나무(이른바 茶王樹)앞에 마주선 감동은 이 글을 읽는 우리에게까지 절절하게 전해 온다. 차나무 가운데 왕이라 불린 이 나무는 높이가 9.8미터 나무 둘레가 무려 10미터라고 한다. 8백 살 묵은 차나무에는 거기 능히 차신(茶神)이 깃들여 있을 법하다.

   옹은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나는 차왕수가 있는 주위의 밀림 지역에 들어서는 순간 가볍게 흥분되었는데, 바로 차왕수 앞에 서는 순간그냥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내 나이 이제 90을 바라보는데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리다니. 이 성스런 나무 앞에 서자 어떤 감동을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내가 차를 접한 지 한평생을 거쳐 비로소 차의 근원지에 섰다는 그 감회를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이런 말로 자신의 삶을 축복하고 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차를 마시며, 차를 널리 알리면서 살아온 지금까지의 나의 삶을 스스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드디어 차의 근원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에게 주어진 하나의 축복이었다. 90년 세월의 궁극 목적이 차왕수를 보기 위함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차를 가까이하면서 내 기억에 아직도 생생하게 그 향기가 배어 있는 차는 어느 해 겨울 불일암의 다실에서였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해질녘 금당 선생이 찾아오셨다. 주방에 내려가 함께 저녁을 먹고 다실에 들어와 밤이 이슥하도록 차에 얽힌 이야기를 나누면서 차를 마셨다.

   그때 가져온 차가 납작한 갑에 든 용정차였는데, 향기와 맛과 빛깔을 제대로 갖춘, 눈이 번쩍 뜨이는 일급품이었다. 보통 차는 두세 번 우리면 그것으로 그만인데, 이 용정차는 대여섯 번을 우려도 한결같은 맛과 향기였다.

   그 후로는 같은 용정차인데도 그런 차를 접하지 못했다.

   좋은 차는 좋은 물을 만나야 제 맛을 낼 수 있다. 사람도 좋은 짝을 만나야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 글을 쓰고 있으니 문득 차를 마시고 싶다. 홀로 마시는 차를 신(神)이라고 했던가.
 

95. 3.

글출처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법정스님, 샘터)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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