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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새의 보금자리

오작교 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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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며칠 전부터 창 밖에서 '톡톡 톡톡'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무심히 흘리고 말았었다. 옮겨 심은 나무에 물을 주러 나갔다가 톡톡 소리를 내는 그 실체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것은 난로 굴뚝의 틈새에서 박새가 포르르 날아가는 것을 보고서였다. 박새가 그 곳에 깃을 치고 사는 모양이었다.

   박새는 여느 새와는 달리 거처를 별로 가리지 않는다. 웬만한 곳이면 아무데나 보금자리를 친다. 뒤꼍에 놓아둔 상자 속이나 혹은 처마 밑모서리 같은 데 둥지를 틀 만하면 그곳에 거처를 마련하여 알을 낳아 새끼를 친다.

   다른 새 같으면 쇠붙이로 된 난로 굴뚝같은 데에는 보금자리를 마련하지 않을 텐데, 겨우 그 몸이 드나들 만한 그 틈새를 어떻게 찾아냈는지 그곳에 깃을 친 것이다. 자신의 거처에 이렇듯 무심한 박새의 대범한 생태를 지켜보면서, 그 동안 내가 살아온 거처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출가 수행자에게는 원래 자기의 집이란 따로 없다. 설사 자신의 힘으로 지어 놓은 절이나 암자라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유물이지 개인의 사유물이 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절이 1천여 년을 두고 우리 모두의 절로서 오늘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저 인연 따라 한때 머물다가 그 인연이 다해 떠나면 그뿐이다. 언젠가는 이 몸뚱이도 버리고 떠나갈 텐데, 나무와 흙과 돌과 쇠붙이 등으로 엮어 놓은 건조물에 얽매일 수 있겠는가.

   산에 들어와 산 지 어느새 40년이 가까워졌네라고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어느새' 란 말이 이마를 치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고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바뀌다 보니, 40년이 훌쩍 지나간 것이다. 40년 동안 내가 기대고 살던 곳이 어디어디였나, 오늘 새벽 두견새 소리를 들으면서 헤아려 보았다.

   중 되러 찾아간 절이 통영 미래사, 집이 낮아 문지방에 연방머리를 받히면서, 배가 고파서 우물가에 흘린 국숫발도 맛있게 주워 먹던 시절이었다. 행자실에서 딱딱한 목침을 베고 자는데도 일이 고되어 잠이 늘 꿀맛 같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때는 조촐한 선원禪院이었는데, 요즘은 집도 커다랗게 세워졌고 절 분위기도 예전과는 딴판이 되었다.

   중이 되어 스승을 모시고 처음으로 지낸 곳이 지리산에 있는 하동 쌍계사 탑전, 섬진강 건너 백운산이 아득히 바라보이는 선원이었다. 입선(入禪)시간이 되면 방이 비었을 때도 죽비 소리가 저절로 울린다는 그런 곳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착실한, 아주 착실한 풋중 시절을 보냈다. 지금 돌이켜보아도 맑고 투명한 시절이었다.

   한겨울 맨밥에 간장만 먹고 지내면서도 선열(禪悅)로 충만하던 나날이었다. 오늘과 그 시절을 견주어 볼 때 그때가 A학점이었다면 오늘은 D나 E밖에 안 될 것 같다. 그것도 점수를 추하게 주어서. <화엄경>에 "초발심 때 바로 깨달음에 이른다." 는 말은 모든 발심 수행자에게 귀감이 될 교훈이다.

   천릿길도 맨 처음 내딛는 그 한 걸음에 달렸다는 옛말이 있는데, 우리가 되새겨 볼 만한 가르침이다. 첫걸음을 어떻게 내딛느냐에 따라 목표 지점은 얼마든지 달라진다. 그 맑고 아늑하던 도량이 지금은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다음으로 의지해 살던 곳이 합천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이 봉안된 장경각 담 밖에 있는 퇴설당 선원이었다. 큰절에서 많은 대중과 어울려 살게 되니, 보고 듣고 느끼면서 배울 것도 많지만 무가치한 일에 시간을 쏟아 버리는 그런 아쉬움도 있었다. 어쨌든 이곳 가야산 해인사에서 열두 해를 살면서 말하자면 중으로서 잔뼈가 굵은 셈이다.

   아침저녁 큰 법당에서 대중과 함께 예불을 마치고 나서, 따로 장경각에 올라가 절을 하면서 기도하던 그 정진이 지금도 좋게 기억되다. 기도란 무슨 소원을 비는 일이 아니라, 마음을 활짝여는 수행이란 걸 겪었던 시절이다.

   해인사에서 운하 스님과 만나게 된 인연으로 내 중 살림살이는 크게 바뀌게 되었다. 그 전까지는 걸망 하나 메고 이 산 저 산 찾아다니는 운수승(雲水僧)이었는데, 이때부터 원고지 칸을 메우는 일에 발을 적시게 되었다. 좋게 말하면 수도생활이 사회성을 띠게 되었다고 하겠지만, 억새풀처럼 시퍼렇던 기상이 가시게 된 분수령이 되었을 것이다.

   양산 통도사 원통방(圓通房)에서 불교사전 편찬 일을 거들면서, 비로소 신문을 보고 라디오 뉴스를 들었다. 움직이는 세상과 접하게 된 것이다. 절에 들어오기 전에 익혔던 업이 서서히 움트기 시작했다. 이른 봄부터 늦가을까지 통도사에서 지내는 그 해 4.19혁명을 맞이했었다. 종교의 역사의식에 대해서 골똘하게 생각하면서 세상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시기였다.

   서울 안국동에 있는 선학원은 내가 처음으로 스승을 친견, 머리를 깎고 먹물 옷을 걸치게 된 인연 있는 절인데, 불교사전 일로 이곳에 올라와 있으면서 5.16군사 쿠데타를 겪었다. 그날 아침 총성이 여기저기서 들려왔고 노스님 한 분이 절 마당에서 어정거리다 팔에 유탄을 맞아 피를 흘리는 것을 목격하고, 아하 혁명이란 무력으로 피를 흘리게 하는 일이구나 싶었다.

   사전이 출간되자 나는 다시 옛 보금자리로 돌아갔다. 해인사 관음전, 앞산이 내다보이는 전망 좋은 맨 끝방, 이름하여 소소산방(笑笑山房).

   동국대학에 대장경을 번역하는 역경원이 개원되자 원장으로 취임한 운허 스님께서 함께 일을 하자는 간곡한 권유로, 그때는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이었던 봉은사로 거처를 옮겼다. 판전 아래 별당이 내게 배당된 집이었는데, 노스님도 아닌 젊은 것의 처소가 별당이란 명칭이 어울리지 않아 다래헌(茶來軒)이라고 이름을 지어 편액을 달았다. 이곳에서 나는 차맛을 비로소 알았기 때문이다.

   6년 남짓 지낸 다래헌 시절. 독 묻은 세월에 뛰어들어 군사 독재에 저항,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면서 뜻을 같이 하는 이들끼리 맺은 동료의식이 어떤 것이란 걸 절문 밖에서 체험하게 되었다. 이때 제도권 불교 교단에 환멸을 느껴 오늘날까지도 나는 제도권 교단에 발을 붙이지 않고 있다.

   그 다음으로 옮겨 간 곳이 승보 사찰인 조계산 송광사. 산중 빈 암자 터에 열다섯 평 3칸짜리 집을 지어 이름을 불일암이라고 했다. 중 노릇을 다시 시작한다는 결의로 집을 지은 것이다. 이때부터 나는 철저하게 홀로 사는 연습을 해온 셈이다. 홀로 있을수록 함께 할 수 있다는 이상야릇한 말뜻도 알게 되었다.

   한 곳에서 15.6년을 살다 보니 삶이 무료하고 당초의 생기가 점점 사라져 갔다. 그리고 헛이름에 속아 찾아오는 사람들로 인해 '함께할 수'가 없었다. 불일암은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지만, 내 삶의 다시 시작하기 위해 훌쩍 떠나와 머문 곳이 이 오두막이다. 네 번째 여름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산 저산, 이 절 저 절을 다니면서도 이곳이야말로 영원한 내 안식처라고 생각한 데는 아직 없다. 인연 따라 머무는 날까지 머물면서 나를 가꾸고 다듬을 따름이다. 언젠가는 이 껍데기도 벗어 버릴 텐데, 영원한 처소가 어디 있겠는가. 그 전 같으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옮기고 고치면서 당장에 해치우고 마는 그런 성미였는데, 이제는 어지간하면 주어진 여건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일없이 간소하게 사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었다. 그 대신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이 나답게 살고 싶다.

   난로 굴뚝 터진 모서리에 깃을 치고 사는 박새를 보면서 지나온 내 보금자리를 뒤돌아보았다. 나도 저 박새처럼 무심할 수 있다면 그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이 홀가분하게 살겠구나 싶다. 그러나 저 박새가 알을 까 새끼를 데리고 보금자리를 떠나갈 때까지는, 보리누름에 추위가 있더라도 난로에 불을 지필 수가 없겠다. 내가 오늘 그 보금자리를 보았으니, 그것을 지키고 보살핌 칙임이 내게 주어진 것이다.

   보는 자에게는 책임이 따른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함께 사는 기쁨도 누린다.
 
<95 .6>
글출처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법정스님, 샘터)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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