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누구냐
도서명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
---|
감기를 치르고 났더니 맛과 냄새를 제대로 느낄 수 없다. 오랜만에 미역국을 끊여 먹었지만 간이 짠지 싱거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대로 맑은 아침, 건너 숲에서 우는 뻐꾸기 소리를 들으면서 광주 한국제다에서 보내온 햇차 '감로(甘露)'를 마시니 차향기만은 조금 알 것 같았다.
어제 담가 놓은 속옷을 개울물에 빨아 뒤꼍 빨랫줄에 널고, 쌀 항아리 정리하여 흘린 낟알들 새들 먹이로 헌식대 위에 놓아 주었다. 장에서 사온 고추모와 케일을 세 두렁에 나누어 심었다. 5월 하순까지 서리가 내리는 곳이라 일부러 느지막이 심은 것이다.
오두막을 비운 사이 처마 끝에 매달아 놓은 풍경을 어느 손이 떼어갔다. 짐승은 그렇지 않은데 사람은 꼭 그 자취를 남긴다. 바다가 먼 산골이라 생선 대신 풍경에 매달린 물고기라도 데어다 삶아 먹으려고 그랬는지, 아니면 고기가 용이 되어 승천을 했는지,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전 같으면 없어진 풍경을 다시 구해다가 매달아 놓을 텐데, 이제는 없으면 없는 대로 지낸다. 풍경 소리 없는 적막의 상태도 즐길 만하다.
엊그제부터 모란이 핀다. 아랫녘에서는 자취도 없이 벌써 지고 말았는데, 이 산중에서는 장미의 계절인 6월에야 모란이 핀다. 지대가 놓은 곳이라 그러는지 꽃빛깔이 아주 투명하다. 늦추위와 미친바람에 시달리면서도 꽃을 피운 그 모습이 기특하고 애처롭게 여겨졌다.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말 가운데 하나가 '부처'라는 용어다. 입만 벌리면 부처가 어떻게 보살이 어떻고 하는 말로 귀에 못이 박혔기 때문일 것이다.
며칠 전 장바닥에서 수염이 텁수룩하고 눈빛이 좀 이상하게 보이는 웬 사내가 나를 보더니 불쑥 물었다.
"스님, 뭐 좀 물읍시다."
"뭔데?"
그는 나를 빤히 보더니 내뱉듯 말했다.
"부처란 어떤 사람입니까?"
나도 내뱉듯 즉석에서 대꾸를 했다.
"이렇게 묻는 너는 도대체 누구냐?"
그는 어릿어릿 더 말이 없었다.
헛눈을 팔지 말게. 그대 마음 밖에서 따로 부처를 찾지 말게. 그대가 바로 '그대 자신' 일 때 어디에도 거리낌이 없는 자유인이다. 세속에 살면서도 그 세속적인 것에 물들거나 얽매이지 않을 때 그대는 그대 자신일 수 있다. 개체인 그대가 전체인 그대로 탈바꿈하면, 네가 어떻고 내가 어떻고 하는 시시콜콜한 일상의 늪에서 훌쩍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를 지금의 우리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 마음이다. 내 마음이 악한 일에 머물면 그것이 곧 지옥을 만들고, 내 마음 착한 일에 머물면 그것이 곧 천국을 만든다. 누가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그렇게 지어서 만드는 것. 그렇기 때문에 ' 이 마음이 곧 부처(卽心是佛)' 라 하고, '마음 밖에 따로 부처는 없다(心外無佛)' 고 말한 것이다.
선종禪宗의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분은 6조 혜능慧能(638~713)과 마조 도일(馬祖 道一, 709~788)이다. 마조의 흡인력은 대단해서 그 문하에서 선의 꽃이 열매를 맺게 된다. 마조는 어려서 출가하여 스님이 된 후 남악산으로 들어가 열심히 참선을 했다. 그때 회양 선사가 남악산 반야사에서 가르침을 펴고 있었는데, 마조를 보는 순간 그가 큰 그릇임을 알아차린다.
스승은 제자에게 가까이 다가가 묻는다.
"너는 거기서 무엇하고 있느냐?"
제자는 솔직하게 대답한다.
"좌선합니다."
"좌선을 해서 무엇하게?"
"부처가 되려고 좌선합니다."
이튿날 스승은 제자가 좌선하고 있는 그 앞에서 벽돌을 득득 돌에 갈았다. 제자는 궁금해서 물었다.
"무엇하려고 벽돌을 가십니까?"
"갈아서 거울을 만들까 하고."
"아니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들다니요?"
이때 스승은 정색을 하고 말한다.
"그래 앉아만 있으면 부처가 될 줄 아는가?"
이 말에 제자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소수레가 가지 않을 때는 수레를 때려야 하는가 소를 때려야 하는가? 선은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집착이 없어 취하고 버릴 게 없는 것이 선이지!"
이 가르침에 제자는 마음이 열렸다. 스승에게 예배드린 다음다시 물었다.
"마음을 어떻게 가져야 '집착이 없는 삼매(無相三昧)'에 들 수 있습니까?"
"마음의 지혜를 가꾸는 것은 씨를 뿌리는 일이고, 내가 법을 말하는 것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같다. 다행히 너는 내 가르침을 받기에 알맞은 인연을 갖추었으니 곧 도를 보게 될 것이다. 내 시를 들어보라."
마음밭에 갖가지 씨앗 있어 비를 맞으면 다 싹이 트리라 삼매의 꽃은 그 모습 없나니 어찌 이루어지고 부서지고 하리. 이 시를 듣고 마조는 귀가 번쩍 뜨여 본래의 자신이 된 것이다. 그 후 10년 동안 마조는 스승을 가까이서 모셨다. 이 기간 동안 그의 도는 더욱 원숙해졌다. 회양 선사 문하에 탁월한 제자들이 많았지만 스승의 혼을 이어받은 사람은 마조 한 사람뿐이었다고 역사는 전한다.
마조의 가르침은 '마음이 곧 부처'라는 이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이 가르침 아래서 무수한 인재가 쏟아져 나왔다.
한 수행자가 마조를 찾아왔을 때 그의 우람한 체격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아따, 그 법당 한번 웅장하구나, 그런데 그 법당 안에 부처가 안 계시군."
수행자는 예배 드린 후 공손히 여쭈었다.
"저는 여러 경전을 읽어 그 뜻은 대강 이해하고 있지만,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스승은 말한다.
"이해하지 못하는 그 마음이 바로 부처다. 그 밖에 따로 무엇이 있는 게 아니다."
그러면 달마 조사께서 은밀히 전해 준 법은 무엇입니까?"
"그대는 쓸데없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군, 물러가 있다가 다음에 오게."
그가 일어나 절을 하고 물러가려고 하자 마조는 그의 등에 대고 고함을 쳤다.
"어이!"
그가 고개를 돌리자 마조는 물었다.
"이게 무엇이지?"
이 물음에 그는 크게 깨달았다.
또 이런 이야기가 전해 온다. 중들 꼴도 보기 싫어하던 한 사냥꾼이 사슴을 쫓다가 우연히 마조의 암자를 지나게 된다. 도망가는 사슴을 못 보았느냐고 묻는 사냥꾼에게 마조가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사냥꾼이오."
"그럼, 화살 하나로 몇 마리나 잡나?"
"그야 한 번에 한 마리씩이지요."
"그 정도라면 시원찮은 솜씨군."
사냥꾼은 슬그머니 부아가 돋았다.
"그렇다면 스님은 활을 쏠 줄 아시오?"
"알고말고"
"화살 하나로 몇 마리나 잡소?"
"나야 한 화살로 한 무리를 잡을 수 있지."
"스님이 어찌 그리 많은 살생을 한단 말이오?"
"그렇게 잘 알면서 어째서 그대는 자기 자신을 쏘지 않는가?"
사냥꾼은 비로소 풀이 죽었다.
"그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 억겁을 두고 무명번뇌를 쌓아 오기만 했는데, 다행히 시절 인연을 만나 오늘에야 빛을 찾았구나."
사냥꾼은 활을 버리고 그 길로 수행자가 되었다. 착실한 정진 끝에 마침내 본래의 자신을 되찾게 된다. 선종사에 나오는 석공혜장(石鞏慧藏)이 그의 이름이다.
장바닥에서 만난 그 사나이를 위해 쓴 글인데, 읽어서 득이 될 수 있는 인연이 닿을지 모르겠다. 마음 밖에서 찾지 말게.
어제 담가 놓은 속옷을 개울물에 빨아 뒤꼍 빨랫줄에 널고, 쌀 항아리 정리하여 흘린 낟알들 새들 먹이로 헌식대 위에 놓아 주었다. 장에서 사온 고추모와 케일을 세 두렁에 나누어 심었다. 5월 하순까지 서리가 내리는 곳이라 일부러 느지막이 심은 것이다.
오두막을 비운 사이 처마 끝에 매달아 놓은 풍경을 어느 손이 떼어갔다. 짐승은 그렇지 않은데 사람은 꼭 그 자취를 남긴다. 바다가 먼 산골이라 생선 대신 풍경에 매달린 물고기라도 데어다 삶아 먹으려고 그랬는지, 아니면 고기가 용이 되어 승천을 했는지,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전 같으면 없어진 풍경을 다시 구해다가 매달아 놓을 텐데, 이제는 없으면 없는 대로 지낸다. 풍경 소리 없는 적막의 상태도 즐길 만하다.
엊그제부터 모란이 핀다. 아랫녘에서는 자취도 없이 벌써 지고 말았는데, 이 산중에서는 장미의 계절인 6월에야 모란이 핀다. 지대가 놓은 곳이라 그러는지 꽃빛깔이 아주 투명하다. 늦추위와 미친바람에 시달리면서도 꽃을 피운 그 모습이 기특하고 애처롭게 여겨졌다.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말 가운데 하나가 '부처'라는 용어다. 입만 벌리면 부처가 어떻게 보살이 어떻고 하는 말로 귀에 못이 박혔기 때문일 것이다.
며칠 전 장바닥에서 수염이 텁수룩하고 눈빛이 좀 이상하게 보이는 웬 사내가 나를 보더니 불쑥 물었다.
"스님, 뭐 좀 물읍시다."
"뭔데?"
그는 나를 빤히 보더니 내뱉듯 말했다.
"부처란 어떤 사람입니까?"
나도 내뱉듯 즉석에서 대꾸를 했다.
"이렇게 묻는 너는 도대체 누구냐?"
그는 어릿어릿 더 말이 없었다.
헛눈을 팔지 말게. 그대 마음 밖에서 따로 부처를 찾지 말게. 그대가 바로 '그대 자신' 일 때 어디에도 거리낌이 없는 자유인이다. 세속에 살면서도 그 세속적인 것에 물들거나 얽매이지 않을 때 그대는 그대 자신일 수 있다. 개체인 그대가 전체인 그대로 탈바꿈하면, 네가 어떻고 내가 어떻고 하는 시시콜콜한 일상의 늪에서 훌쩍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를 지금의 우리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 마음이다. 내 마음이 악한 일에 머물면 그것이 곧 지옥을 만들고, 내 마음 착한 일에 머물면 그것이 곧 천국을 만든다. 누가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그렇게 지어서 만드는 것. 그렇기 때문에 ' 이 마음이 곧 부처(卽心是佛)' 라 하고, '마음 밖에 따로 부처는 없다(心外無佛)' 고 말한 것이다.
선종禪宗의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분은 6조 혜능慧能(638~713)과 마조 도일(馬祖 道一, 709~788)이다. 마조의 흡인력은 대단해서 그 문하에서 선의 꽃이 열매를 맺게 된다. 마조는 어려서 출가하여 스님이 된 후 남악산으로 들어가 열심히 참선을 했다. 그때 회양 선사가 남악산 반야사에서 가르침을 펴고 있었는데, 마조를 보는 순간 그가 큰 그릇임을 알아차린다.
스승은 제자에게 가까이 다가가 묻는다.
"너는 거기서 무엇하고 있느냐?"
제자는 솔직하게 대답한다.
"좌선합니다."
"좌선을 해서 무엇하게?"
"부처가 되려고 좌선합니다."
이튿날 스승은 제자가 좌선하고 있는 그 앞에서 벽돌을 득득 돌에 갈았다. 제자는 궁금해서 물었다.
"무엇하려고 벽돌을 가십니까?"
"갈아서 거울을 만들까 하고."
"아니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들다니요?"
이때 스승은 정색을 하고 말한다.
"그래 앉아만 있으면 부처가 될 줄 아는가?"
이 말에 제자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소수레가 가지 않을 때는 수레를 때려야 하는가 소를 때려야 하는가? 선은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집착이 없어 취하고 버릴 게 없는 것이 선이지!"
이 가르침에 제자는 마음이 열렸다. 스승에게 예배드린 다음다시 물었다.
"마음을 어떻게 가져야 '집착이 없는 삼매(無相三昧)'에 들 수 있습니까?"
"마음의 지혜를 가꾸는 것은 씨를 뿌리는 일이고, 내가 법을 말하는 것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같다. 다행히 너는 내 가르침을 받기에 알맞은 인연을 갖추었으니 곧 도를 보게 될 것이다. 내 시를 들어보라."
마음밭에 갖가지 씨앗 있어 비를 맞으면 다 싹이 트리라 삼매의 꽃은 그 모습 없나니 어찌 이루어지고 부서지고 하리. 이 시를 듣고 마조는 귀가 번쩍 뜨여 본래의 자신이 된 것이다. 그 후 10년 동안 마조는 스승을 가까이서 모셨다. 이 기간 동안 그의 도는 더욱 원숙해졌다. 회양 선사 문하에 탁월한 제자들이 많았지만 스승의 혼을 이어받은 사람은 마조 한 사람뿐이었다고 역사는 전한다.
마조의 가르침은 '마음이 곧 부처'라는 이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이 가르침 아래서 무수한 인재가 쏟아져 나왔다.
한 수행자가 마조를 찾아왔을 때 그의 우람한 체격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아따, 그 법당 한번 웅장하구나, 그런데 그 법당 안에 부처가 안 계시군."
수행자는 예배 드린 후 공손히 여쭈었다.
"저는 여러 경전을 읽어 그 뜻은 대강 이해하고 있지만,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스승은 말한다.
"이해하지 못하는 그 마음이 바로 부처다. 그 밖에 따로 무엇이 있는 게 아니다."
그러면 달마 조사께서 은밀히 전해 준 법은 무엇입니까?"
"그대는 쓸데없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군, 물러가 있다가 다음에 오게."
그가 일어나 절을 하고 물러가려고 하자 마조는 그의 등에 대고 고함을 쳤다.
"어이!"
그가 고개를 돌리자 마조는 물었다.
"이게 무엇이지?"
이 물음에 그는 크게 깨달았다.
또 이런 이야기가 전해 온다. 중들 꼴도 보기 싫어하던 한 사냥꾼이 사슴을 쫓다가 우연히 마조의 암자를 지나게 된다. 도망가는 사슴을 못 보았느냐고 묻는 사냥꾼에게 마조가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사냥꾼이오."
"그럼, 화살 하나로 몇 마리나 잡나?"
"그야 한 번에 한 마리씩이지요."
"그 정도라면 시원찮은 솜씨군."
사냥꾼은 슬그머니 부아가 돋았다.
"그렇다면 스님은 활을 쏠 줄 아시오?"
"알고말고"
"화살 하나로 몇 마리나 잡소?"
"나야 한 화살로 한 무리를 잡을 수 있지."
"스님이 어찌 그리 많은 살생을 한단 말이오?"
"그렇게 잘 알면서 어째서 그대는 자기 자신을 쏘지 않는가?"
사냥꾼은 비로소 풀이 죽었다.
"그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 억겁을 두고 무명번뇌를 쌓아 오기만 했는데, 다행히 시절 인연을 만나 오늘에야 빛을 찾았구나."
사냥꾼은 활을 버리고 그 길로 수행자가 되었다. 착실한 정진 끝에 마침내 본래의 자신을 되찾게 된다. 선종사에 나오는 석공혜장(石鞏慧藏)이 그의 이름이다.
장바닥에서 만난 그 사나이를 위해 쓴 글인데, 읽어서 득이 될 수 있는 인연이 닿을지 모르겠다. 마음 밖에서 찾지 말게.
<95 .7>
글출처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법정스님, 샘터)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