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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는 눈을 떴으면

오작교 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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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영혼의 母音
   우리들 벽에는 묵은 달력이 떼어지고 새 달력이 걸려 있다. 이렇게 또 새해가 우리 앞에 다가선 것인가. 사실은 세월이 오가는 게 아니라, 우리들 인생이 흘러가는 것이지만….

   새해가 돋았다고 해서 갑자기 우리들 생활에 어떤 이변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저 무심(無心)할 수만도 없다. 오늘이 어제의 지속인 동시에 내일의 과정이라고 생각할 때 오늘의 의미는 절대 작지 않은 것이다. 해가 바뀔 때마다 새 일기장을 펼치듯이 그것이 비록 부질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새해 아침이면 우리들의 가는 소망을 펼쳐보게 된다.

   새해에는 눈을 떴으면 좋겠다. 이기적인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같은 인간끼리 총부리를 마주 대고 야수처럼 물고 뜯는 전쟁놀이에서 그만 눈을 떴으면 좋겠다. 우리들이 이 시대를 함께 사는 것은 서로 할퀴고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 모두가 행동으로 보여주었으면 싶다. 우리들은 증오를 나누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만난 것이라고, 안티고네의 목소리를 빌 것도 없이 우리들 속마음에서 저절로 울려나 왔으면 싶다.

   그래서 언어와 풍습이 다른 이국 병사들이 철수하건 감군하건 겨레의 자존심을 내동댕이쳐가면서 애걸복걸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새해에는 눈을 떴으면 좋겠다. 기술문명의 틈바구니에서 시들어가는 인간의 영역이 새롭게 움텄으면 좋겠다. 물량의 집적만이 인간을 잘살게 하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이제, 밖으로 밖으로만 향하던 우리들의 시설이 내면으로도 향을 바꾸었으면 좋겠다. 소음과 광란에 젖은 우리들의 귀를 안으로 돌려 인간의 가장 깊숙한 데서 울려 나오는 그 소리를 듣도록 했으면 좋겠다.

   인간의 분수를 헤아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를 슬기롭게 가능했으면 싶다. 새해에는 극만 눈을 떴으면 좋겠다. 전도된 가치 의식이 제자리로 회귀했으면 좋겠다. 이웃이야 어떻게 되건 아랑곳없이 나만 잘살면 그만이라는 이기심이 스러졌으면 좋겠다. 우리는 서로 의지해 함께 사는 인간 가족임을, 본질적으로 맺어진 공동운명체라는 것을, 이웃의 불행이나 결핍이 곡 나 자신의 그것이라는 것을 자각했으면 싶다. 한편에서는 헐벗고 굶주리는데 다른 쪽에서는 비만해진 체중을 조절하기 위해 골프채를 비켜 드는 이런 비정스런 단층이 말끔히 가셔졌으면 좋겠다.

   새해에는 제발 눈을 떴으면 좋겠다. 날로 치솟아 비대해지고 있는 도시의 외곽에는 억울하게, 너무나도 억울하게 사는 인간 이하의 촌락이 있다는 사실이,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의 얼에 새겨졌으면 좋겠다. 이 격차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그리고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를 제발 정신차려 주었으면 좋겠다.

   읽고 싶은 책을 헐한 값으로 사보았으면 좋겠다. 도둑촌의 빈 벽을 채우기 위해 만든 것 같은 겉치레의 전집류가 아니고, 읽으면 환하게 눈이 뜨일 그런 양서(良書)가 단행본으로 헐값에 쏟아져 나왔으면 좋겠다.

   아,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탐욕하지 않고 어리석지 않게 우리 모두가 초하루 아침의 달력처럼 싱싱하고 순수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1971. 1. 1
글출처 : 영혼의 母音(법정스님, 샘터)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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