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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은 뿌리로 돌아간다

오작교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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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이 새어 창문을 열자 간밤에 내린 무서리로 온 산천이 허옇게 얼어붙었다. 눈이 내렸는가 싶을 만큼 가지마다 허연 서리로 치장했다. 깊은 산골이라 산 아래와는 달리 눈이 오기 전에 연일 무서리가 내린다.

   지난 가을 푸른 하늘 아래 눈이 부시도록 노란빛을 마음껏 뿜어내던 해바라기는 그새 허리를 꺾고 꽃대가 무겁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 생기에 넘치던 그 노란빛은 어디로 사라져버렸는가. 칙칙한 갈색으로 변한 채 씨앗을 머금고 있는 꽃대는 말이 없다. 이 해 바라기는 암스테르담의 '반 고호 뮤지움'에서 고호를 좋아하는 친구가 사 온 씨앗을 심은 것이다. 추녀가 길어 어둑한 방에 해바라기를 한 송이 놓아두면 어둠이 가시고 환해진다. 식탁에 해바라기를 꽂아놓으면 찬이 없어도 풍성한 식탁이 된다. 그때 몇 장 찍어놓은 사진을 꺼내 보니 세월의 무상감이 해일처럼 차오른다. 젊어서 찍은 사진을 영전에 놓아두었을 때의 그런 묘한 감정.

   꽃은 무슨 일로 피었다가 지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살 만큼 살다가 때가 다하면 생을 막음 하듯이, 생명의 질서에서는 꽃이나 사람이 다를 바 없다. 나무들은 봄이 오면 꽃을 피우고 겨울이 오면 옷을 벗는다. 꽃은 보는 사람에게 아름다움과 향기와 기쁨을 안겨 준다. 한 송이의 꽃이 메마르고 녹슬기 쉬운 우리들의 일상에 얼마만 한 위로와 생기와 기쁨을 주는지, 운치 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시시로 경험하고 있을 것이다.

   꽃이 있는 집과 꽃이 없는 집은 겉으로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은 것 같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질에 있어서는 하늘과 땅만큼 현격하다. 길거리에서 꽃을 안거나 들고 가는 사람을 보면 그 신분이 어떻든 간에 친밀감이 간다. 그 사람의 꽃다운 마음씨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하와이에 가면 마중 나온 친지들이 목에 레이꽃 타래를 걸어준다. 그 향기가 진해서 야간비행에서 내리면 졸음이 활짝 낀다. 그곳 대학에서 강연을 한 일이 있는데, 연단에 올라서자 이 사람 저 사람 줄줄이 올라와 꽃목걸이를 걸어주는 바람에 얼굴까지 가리게 되어 한바탕 크게 웃었다. 요즘 내 오두막에는 산 아래서 꺾어온 노란 소국 한 다발이 단지에 담겨 은은한 향기를 들려주고, 창가에는 빨간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산수유 한 가지가 오지병에 꽂혀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다. 이런 꽃과 열매가 산방의 조촐한 품격을 거들어준다. 산수유는 이른 봄에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담황색 꽃도 볼 만하지만, 늦가을에 서서 겨울에 이르기까지 청냉한 하늘 아래 빨갛게 달린 그 열매가 눈부신 조화를 이룬다.

   내가 좀 더 한가하고 적적해지면 벼루에 먹을 갈아 이 국화 향기와 산수유 열매가 지켜보는 아래서 무심히 붓장난할 것이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는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그 생명을 유지해 간다. 뿌리는 대지로부터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그 보상으로 꽃과 열매로써 대지에 되돌려준다. 받기만 하고 주지 않으면 그 생명을 지속할 수 없는 것이 우주의 질서요 순환의 법칙이다. 낮은 밤이 받쳐주기 때문에 밝고, 밤은 낮이 비워주기 때문에 그 자리에 어둠을 이룬다.

   물질 만능의 덫에 걸린 현대의 우리들은 무지 때문에 지구 곳곳에서 그 우주 질서와 순환의 법칙을 깨뜨리고 있다. 오늘날 심각해지고 있는 생태학적 위기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대지로부터 끊임없이 빼앗기만 하지 아무것도 되돌려주려고 하지 않는다. 이래서 대지는, 서서히 불모의 땅이 되어가면서 죽어간다. 이 지구가 죽어가고 있다면 우리 안에 있는 인간의 대지 도 또한 죽어간다. 왜냐하면 인간은 독립된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지구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우주의 커다란 생명력과 우리 자신이 하나라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웅덩이가 이끼로 무겁게 덮여 썩고 있다면, 그것은 강물과 이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강은 잠시도 흐름을 멈추지 않는다.

   지난번 강변의 정자에 갔을 때, 정자 가까이 밤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석양 별에 누릇누룻 물들어가는 그 잎이 어찌나 아름다웠던 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지금껏 여기저기에서 밤나무는 많이 보아 왔지만, 정자 곁에 우람하게 서 있는 그 밤나무의 물든 잎처럼 고운 것은 처음이다.

   암갈색 가지와 누릇누릇 물든 잎과 청냉한 하늘과 석양의 별이 한데 어울려 기막힌 조화를 이루었다. 누릇누룻 물든 잎이 강바람에 우수수 낙엽으로 지고 있었다. 대지에서 받은 것을 어디에 가두어두지 않고 그 대지에 되돌려주는 것이다. 되돌려주지 않으면 스스로 지탱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순환의 질서를 현대인들도 배워야 한다. 땅에 떨어지는 낙엽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냥 맞이한다. 그것들은 삶 속에 묻혀 지낼 뿐 죽음 같은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때 그곳에 모든 것을 맡기고 순간순간을 있는 그대로 산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뿐인데, 그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삶은 순간순간 새롭게 발견돼야 할 훤출한 뜰이다.

   삶을 마치 소유물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소멸을 두려워 한다. 그러나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모두가 한때일 뿐. 그러니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새롭게 발견되는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간밤에는 온 골 안이 소란스러울 정도로 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치더니, 해가 떠오르자 언제 그랬느냐 싶게 화창하고 온화한 날씨다. 몇 해나 되었는지 덕지덕지 풀 딱지가 엉겨 붙고 누렇게 바래 볼품 사나운 미담이 창문을 뜯어내고 새로 발랐다.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 3번 <조화의 영감>을 연거푸 들으면서 일하고 있으니 사는 일이 새삼스레 고마워졌다.

   새로 발라 맑고 환해진 창 앞에 앉아 있으니 내 속 뜰도 맑고 환해지는 것 같다. 이런 창 앞에 앉아 향기로운 차를 들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충만감이 차오른다. 표정이 없이 덤덤한 집에 밝은 창을 달아야 금방 생기가 돌고 집이 살아 숨 쉰다.

   집 자체는 여러 가지 자재로 엮어진 한날 건축물에 지나지 않지만, 그 안에 사람이 살면 비로소 집다운 집이 된다. 따뜻한 가슴을 지니고 모든 것을 맑은 눈으로 바라보면서 사랑하고 입에서 노래가 흘러나오는 사람이 그 안에 살아야 집에 훈김이 돌고 꽃이 피고 새 들이 찾아온다.

   나는 이 오두막에 와 살면서 내 자신을 만나고 되찾게 된 것을 무엇보다도 고맙게 여긴다. 지나온 과거와 다가올 미래에 대한 짐을 벗어버리고, 오로지 지금, 이 순간 속에 사는 홀가분한 자유를 찾은 것이다. 이 순간 속에서 있는 그대로 사는 사람한테는 사슬이 없다. 기억의 사슬도 없고 욕망의 사슬도 없다. 시냇물이 흐르듯 그저 담담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일 뿐. 진정한 자유는 정신적인 데에 있을 것 같다.

   나는 이 창 아래 앉아 귀를 기울인다. 소리 없는 소리에 귀를 모은다. 침묵의 세계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존재의 뜰이 열린다. 이 우주가 하나의 커다란 생명체이고 우리들 자신 또한 그 한 지체다. 그러므로 그 커다란 생명체를 향해 자신을 활짝 열어놓을 때 그 원천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

   서릿바람에 가랑잎들이 휘날리고 있다. 낙엽은 그 근원인 뿌리로 돌아간다. 1992년 이 해는 어디로 가는가?

1992. 12
글 출처 : 버리고 떠나기(법정스님, 샘터)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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