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 사랑한다는 말은 언제라도 늦지 않다.
밤새 내린 눈이 설원을 만들었다. 꽃잎보다 가벼운 눈도 쌓이면 무거워지는 법이다. 무게 없는 생각도 쌓아두면 무거워지는 건 마찬가지이다. 눈이건 생각이건 털어내야 젖지 않는다. 삶에서 미끄러지지 않으려면 마음에 살얼음이 끼도록 내버려둬선 안 된다. 중심을 가지되 가볍게 살아야 한다.
눈 소식 사이로 부음이 온다. 이 눈 속에 누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고인이 된 예 친구를 위해 잠시 기도한다. 살다 보면 한때의 친구가 적이 되는 일은 흔하다. 적까지는 아니더라도 남이 되는 일은 많고도 많다. 그와 내가 친구였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기도 하고, 길에서 만난다 해도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도 있다. 세상을 떠난 친구는 다행히 적이 된 경우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한때 친구였지만 이름조차 잊어버린 사람이었다. 친구가 모르는 남이 된 경우다.
어느 날, 모르는 번호의 전화가 걸려왔다. 모르는 번호는 잘 안받는다. 그런데 누군가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라 모르는 번호인데로 받았다. 전화 속 목소리는 처음 듣는 음성이었다. 중학교 때 친하게 지낸 친구라며 이름을 밝혔지만 그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렇게 까맣게 자기를 잊어버린 나에 비해 그는 내 형제들의 이름과 특성까지 다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래도 기억나지 않느냐며 섭섭해했다. 미안해서 뭔가 좀 아는 척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좁쌀만큼도 기억나는 게 없었던 것이다. 그에겐 소중한 추억이 내게는 소중하기는커녕 전혀 관심도 없었다는 사실을 들킨 것 같아 몹시 당황스러웠다. 인간적으로 정말 미안한 생각이 들어 쩔쩔매는 네게 그가 남긴 말이 충격적이었다. “병원에 가봐라.”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다. 자기를 잊어버렸다는 사실에 대한 서운함과 상실감 비슷한 마음이 느껴졌다. 옛 친구를 잊어버린 나를 그는 기억살싱중에라도 걸린 환자처럼 여기고 싶었던 모양이다.
따지고 보면 세상에 환자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몇 집 건너 한 집마다 우울증 환자가 있다는 시대이다. 너도나도 우울증이다. 겉으로 보기엔 성공했고, 누구보다 공격적 삶을 살던 유명인도 난관에 부딪히면 어려움을 헤처나가거나 책임을 인정하기보다 목숨부터 먼저 던져버리는 세상이다. 세상은 더욱 풍요로워졌고, 강남에 집 한 채만 잘 굴려도 죽을 때까지 돈 걱정 엇이 살 수 있는 세상인데, 집 없는 사람은 집이 없어 우울하고, 집 있는 사람은 있는 대로 우울하다. 경쟁에 내몰린 아이들은 쉽게 죽음을 선택하고, 병원에 가면 온통 스트레스받는 환자들 천지다. 그런데 정작 죽음이 눈앞에 와 앉으면 사람들은 달라질지 모른다. 눈앞에 죽음이 와 있다면 허투루 보내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아깝겠는가.
간혹 죽음의 세계에서 돌아왔다는 사람들을 만난 때가 있다.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이 그들이다. 죽음의 순간 그들은 자신의 몸뚱이를 소생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는 의료진을 허공에 떠 있는 상태로 본다든지, 슬퍼하고 있는 가족들을 본다든지 하며 자신과 자신의 몸이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그들이 말하는 임사체험이란 결국 몸과 의식이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경험이다. 임사체험을 통해 육체의 죽음을 경험해본 사람은 그동안 애주중지하던 몸이 한낱 물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게 갈망하던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살미 얼마나 소중한 기회인지 깨닫는 것이다.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날 이후 나는 다르게 살려고 노력했다.”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보이지 않는 문, 매 순간 그 문을 의식하고 산다면 우리 삶은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꼭 임사체험이 아니더라도 살아 있다는 시실만으로도 세상에 경의를 표하고 싶은 날이 있다. 퍼붓는 비바람 속에 강낭콩 한 알 자라듯, 느리고 느린 속도로 달팽이 한 마리 기어가듯 그렇게 세상 속에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사함을 느낄 때가 있다. 굳게 닫혀 있던 이름의 문이 열리고, 용서할 수 없던 사람을 용서할 때야말로 지상에 묶여 있던 영혼이 날개를 펴고 한 계단 더 높은 곳으로 성장하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