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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다짐 / 그 사랑 놓치지 마라

오작교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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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눈을 천상의 시(詩)처럼 이고 섰는
겨울나무 속에서 빛나는 당신
일월의 찬물로 세수를 하고
새벽마다 당신을 맞습니다

답답하고 목마를 때 깎아 먹는
한 조각 무 맛 같은 신선함

당신은 내게 
잃었던 꿈을 찾아줍니다
다정한 눈길을 주지 못한 나의 일상에
새 옷을 입혀줍니다

남이 내게 준 고통과 근심
내가 만든 한숨과 눈물 속에도
당신은 조용한 노래로 숨어 있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우리의 인사말 속에서도 당신은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고 있습니다

내가 살아 있으므로
또다시 당신은 맞는 기쁨

종종 나의 불신과 고집으로
당신에게 충실치 못했음을 용서하세요

새해엔 더욱 청청한 마음으로
당신을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희망에게」 『시간의 얼굴』
   요즘 수녀원 식탁에는 종종 우리가 농사지은 야콘이나 무를 깎아 메뉴로 내놓곤 합니다. 다른 반찬이나 과일하고는 또 다른 맛을 주는 신선함 덕분에 수녀들은 기뻐하는 표정으로 각자의 접시에 덜어 가곤 합니다.

   이 시는 어느 날 밭에서 무를 뽑으며 떠올려본 희망의 이미지입니다. 진정한 희망이 무엇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선뜻 대답을 못 하겠습니다. 어느 인터뷰에서 ‘숨을 쉬며 살아 있는 것 자체가 희망이고 옆에 있는 사람들도 다 희망’이라는 병상에서 쓴 글을 인용한 적이 있는데, 몇 개의 ‘악플’이 달린 것을 보았습니다. 사는 일에 지치고 힘들어 죽는데 삶이 어찌 희망이 될 수 있느냐며 짜증 섞인 반응을 보인 익명의 독자에게 ‘숨을 못 쉴 정도로 아프다 보면 숨을 쉴 수 있는 것만도 희망으로 여겨진다.’라고 댓글을 달아준 기억이 납니다.

   며칠 전엔 아빠의 폭력에 시달리는 소녀가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물건들도 언젠가는 다 부서질 것 같아 불안하다며 상자 세 개에 물건을 나눠 담아 제 작업실에 두고 갔습니다. 오늘 밤이 지나면 자기가 세상에 없을지도 모르니 꼭 한 번만 만나 달라는 연락이 와서 서른 번 가까이 만나온 우리 동네의 어여쁜 불자 소녀입니다.

   이젠 더 살고 싶지 않다면 절망적인 상황을 호소해 오는 이들에게 저는 어떻게 희망을 이야기하고 다시 살고 싶어지도록 만들어주어야 할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들의 슬픔이 전염되어 저의 일상도 자주 우울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나는 정말 누굴 도와줄 힘이 없네’하고 한숨 쉬다가 ‘그래도 살아야지, 열심히 기도하며 방법을 찾다 보면 어떻게든 될 거야, 내가 힘을 내야 힘을 주지, 다시 살아보라는 희망의 말을 건네기 위해서도 내가 먼저 희망이 되어야지’ 새롭게 다짐해보곤 합니다.

   어느 날 희망을 의인화해 쓴 이 시를 다시 읽어보며 스스로 약속합니다. ‘못 살겠다’ ‘죽겠다’는 말을 내뱉으며 푸념하고 싶은 그 시간에 오히려 작은 기도를 바치고 가슴 속에 다시 한번 희망의 숨을 불어넣겠다고 새해에는 어딘가에 가까이 숨어서 우리를 기다리는 희망에게 겸손한 자세로 악수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글출처 : 그 사랑 놓치지 마라(이해인,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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