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샘터 - 팍팍한 삶, 잠시 쉬어 가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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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문신을 읽어내고, 정오의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가면 또한 벗겨내야 한다.” 옥타비오 파스는 그의 시 <깨어진 항아리>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멕시코의 언어에 대해, 그리고 옥타비오 파스의 시에 대해 문외한인 나는 “햇볕으로 목욕하고 밤의 과실을 따 먹으며 별과 강이 쓰는 글자를 해독해야 한다”고 노래하는 그의 시를 이해하기보다 다만 느낄 뿐이다.
그런데 왜 그를 나는 대륙의 횃불 밑에 앉아 떠올렸던가? 그때 나는 중국을 여행 중이었고, 무후사 뒤뜰에 앉아 변검(變瞼)을 보고 있었다. 쓰촨성(사천성)의 비밀스러운 기예인 변검은 변화무쌍한 인간의 심리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한때 쓰촨성 출신의 남자에게만 비밀리에 전승되었다고 하는 변검은 등장인물의 감정 변화에 따라 가면이 바뀌는데, 바뀌는 속도가 전광석화라 변하기 잘하는 인간의 마음과 닮아 있다.
변검을 보며 옥티비오 파스를 떠올린 건 아마 그가 말한 “시는 인간의 모든 직위의 헛된 위대함에 대한 아름다운 증거를 감추고 있는 가면이다”라는 구절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처럼 시만 가면인 것은 아니다. 인간 또한 죽을 때까지 가면을 쓴 채 살아가는 존재이다. 다양한 가면이 변검에 등장하듯 살기 위해 우리는 수시로 얼굴을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인심이 어떻게 바뀌는지는 직장 떨어지고, 돈 떨어져 찬밥 신세가 되어봐야 알 수 있다. 그래도 바뀌지 않는 친구나 변함없는 연인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괜찮은 인생을 살았으니 좋은 시절 다 갔다고 한탄할 이유가 없다. 직장 그만둔 뒤, 하루에도 수십 통씩 걸려오던 전화가 단 한 통도 오지 않을 무렵 인생은 작심하고 뭔가를 가르치려 명석을 펴기 시작한다. 스스로 감당해야 할 은둔과 좌절의 시간이 비로소 고통의 터널 문을 여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에서 배워야 할 많은 것은 바로 실패와 좌절 속에서 극대화되니 가장 밀도 높은 배움은 터널 속에서 이루어진다. 터널의 깜깜한 절망이 스승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말로만 듣던 변검 공연을 처음 본 곳은 쓰촨성의 성도인 청두에서였다. 주자이거우(구채구: 티베트의 9개 부락이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에 가기 위해 들른 곳인데, 쓰촨 약식과 함께 증류식 술인 바이주(白酒) 등 유명한 게 많은 고장이지만, 채식주의자에 술을 먹지 않는 내겐 그런 먹거리보다 변검 공연을 하는 사당 무후사가 흥미로웠다. 무후사는 이름(제갈공명의 시호가 충무후(忠武侯)) 그대로만 보면 제갈공명을 모시는 도교 사당이지만, 유비·관우·장비가 도원결의를 한 곳이기도 하다.
무후사 뒤뜰, 횃불 아래 앉아 변검을 봤다. 밤은 깊어가고, 탁자 위에 얹어놓은 해바라기 씨를 까먹으며 보는 경연은 신기하고 놀라웠다.
그날 변검과 함께 잊을 수 없던 공연은 막간에 소개한 중국 전통악기 얼후 연주였는데, 해금과 마찬가지로 두 줄로 된 현악기인 얼후 소리가 들려주던 애절함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단 두 줄의 현으로도 그렇게 아름답고 풍부한 소리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날 나는 무후사 뒤뜰에서 처음 알았다. 변검의 신기한 기술과 함께 마치 눈물 흘리듯 두 줄로 흐느끼는 얼후 소리에 감동을 받았다고나 할까.
그러나 감동 또한 가면일 때가 많으니 그날 밤의 감동이 그렇게 오래도록 내 마음을 적신 것도 어쩌면 횃불과 해바라기씨, 그리고 너무 붉어 터질 것 같던 대륙의 석류 같은 밤 정취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쓰고 있는 가면을 너무 감추려 하지는 말자. 살아가면서 가면은 필요할 때가 있으니까. 다만 그것이 변검의 가면처럼 흥미로운 것이 되도록 나 또한 여러 개의 가면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며 살자.
글출처 : 사랑한다는 말은 언제라도 늦지 않다(김재진산문집)
그런데 왜 그를 나는 대륙의 횃불 밑에 앉아 떠올렸던가? 그때 나는 중국을 여행 중이었고, 무후사 뒤뜰에 앉아 변검(變瞼)을 보고 있었다. 쓰촨성(사천성)의 비밀스러운 기예인 변검은 변화무쌍한 인간의 심리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한때 쓰촨성 출신의 남자에게만 비밀리에 전승되었다고 하는 변검은 등장인물의 감정 변화에 따라 가면이 바뀌는데, 바뀌는 속도가 전광석화라 변하기 잘하는 인간의 마음과 닮아 있다.
변검을 보며 옥티비오 파스를 떠올린 건 아마 그가 말한 “시는 인간의 모든 직위의 헛된 위대함에 대한 아름다운 증거를 감추고 있는 가면이다”라는 구절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처럼 시만 가면인 것은 아니다. 인간 또한 죽을 때까지 가면을 쓴 채 살아가는 존재이다. 다양한 가면이 변검에 등장하듯 살기 위해 우리는 수시로 얼굴을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인심이 어떻게 바뀌는지는 직장 떨어지고, 돈 떨어져 찬밥 신세가 되어봐야 알 수 있다. 그래도 바뀌지 않는 친구나 변함없는 연인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괜찮은 인생을 살았으니 좋은 시절 다 갔다고 한탄할 이유가 없다. 직장 그만둔 뒤, 하루에도 수십 통씩 걸려오던 전화가 단 한 통도 오지 않을 무렵 인생은 작심하고 뭔가를 가르치려 명석을 펴기 시작한다. 스스로 감당해야 할 은둔과 좌절의 시간이 비로소 고통의 터널 문을 여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에서 배워야 할 많은 것은 바로 실패와 좌절 속에서 극대화되니 가장 밀도 높은 배움은 터널 속에서 이루어진다. 터널의 깜깜한 절망이 스승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말로만 듣던 변검 공연을 처음 본 곳은 쓰촨성의 성도인 청두에서였다. 주자이거우(구채구: 티베트의 9개 부락이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에 가기 위해 들른 곳인데, 쓰촨 약식과 함께 증류식 술인 바이주(白酒) 등 유명한 게 많은 고장이지만, 채식주의자에 술을 먹지 않는 내겐 그런 먹거리보다 변검 공연을 하는 사당 무후사가 흥미로웠다. 무후사는 이름(제갈공명의 시호가 충무후(忠武侯)) 그대로만 보면 제갈공명을 모시는 도교 사당이지만, 유비·관우·장비가 도원결의를 한 곳이기도 하다.
무후사 뒤뜰, 횃불 아래 앉아 변검을 봤다. 밤은 깊어가고, 탁자 위에 얹어놓은 해바라기 씨를 까먹으며 보는 경연은 신기하고 놀라웠다.
그날 변검과 함께 잊을 수 없던 공연은 막간에 소개한 중국 전통악기 얼후 연주였는데, 해금과 마찬가지로 두 줄로 된 현악기인 얼후 소리가 들려주던 애절함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단 두 줄의 현으로도 그렇게 아름답고 풍부한 소리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날 나는 무후사 뒤뜰에서 처음 알았다. 변검의 신기한 기술과 함께 마치 눈물 흘리듯 두 줄로 흐느끼는 얼후 소리에 감동을 받았다고나 할까.
그러나 감동 또한 가면일 때가 많으니 그날 밤의 감동이 그렇게 오래도록 내 마음을 적신 것도 어쩌면 횃불과 해바라기씨, 그리고 너무 붉어 터질 것 같던 대륙의 석류 같은 밤 정취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쓰고 있는 가면을 너무 감추려 하지는 말자. 살아가면서 가면은 필요할 때가 있으니까. 다만 그것이 변검의 가면처럼 흥미로운 것이 되도록 나 또한 여러 개의 가면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며 살자.
글출처 : 사랑한다는 말은 언제라도 늦지 않다(김재진산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