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발하던 날 / 사랑은 사랑으로 돌아옵니다
은사 스님.
오늘은 바람 한 점 없이 무덥습니다. 공양은 제때에 챙겨 드시는지요? 갈수록 입맛도 없고 몸도 예전 같지 않다며 자리에 누워 계신 것을 보며 문득 스님이 세상을 떠나시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기도 합니다.
언제나 제 삶의 가장 중심에 계신 스님을 떠올리자니 스님은 정말 제게 사랑 그 자체였음을 알게 됩니다. 세상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제가 출가하겠다고 떼를 쓰자 스님께서는 조용히 타이르셨지요.
“대학까지 마친 후에 네가 스스로 인생을 판단할 수 있을 때 출가해도 늦지 않으니 우선 학교 과정을 다 마치도록 하자.”
그러나 그때 겨우 열여섯이었던 저는 막무가내로 출가를 고집했고, 머리를 들이밀려 깎아달라고 졸라댔습니다. 몇 날 며칠을 알아듣도록 타이르고 설명해도 도대체 출가의 의지를 꺾지 않는 저에게 스님은 결국 불연(佛緣)이 깊은 아이라 생각하시고 출가를 허락하셨지요.
부처님 열반일에 맞춰 삭발하기로 정하자 어른들은 법복도 만들고 뭔가를 준비하느라 바빴습니다. 저 역시 제 앞에 새로이 펼쳐질 삶 때문에 약간 흥분한 상태였지요.
그때가 중학교 과정을 끝냈을 무렵이었고, 불교와 깊은 인연이 있긴 있었던지 중학교 2학년 때 선생님께 이런 질문을 한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 왜 사람은 꼭 학교에 다녀야 하나요? 꽃과 나무들은 학교에 안 다녀도 잘 사는데요.”
어이가 없다는 듯 멍하게 바라보시던 선생님은 볼펜으로 제 어깨를 톡톡 치시면서 “그런 엉뚱한 생각 말고 공부나 해”하고 말을 잘랐습니다.
그때 저는 학교와 선생님이 모든 것을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출가해서 스님이 되면 가지고 있던 의문을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 건 그 무렵이었지요.
이윽고 삭발하기로 한 날 아침, 문중의 어른 스님들이 오셨고 절집은 가볍게 들뜨기 시작했습니다. 깨끗한 흰 종이를 깔아놓고, 가위와 삭도가 놓여 있는 상 앞에 함께 머리 깎을 사형과 둘이 나란히 앉자, 스님은 시범이라도 보이듯 가위로 어깨까지 내려온 제 머리를 툭툭 잘라냈습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생각이 바뀌었으면 말하거라.”
머리 깎겠다는 저를 염려하는 눈빛으로 보시던 스님은 그렇게 마지막 기회라도 주시듯 말씀하셨지요. 돌이켜 보면 그때까지 어린아이였던 저는 그 순간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듬성듬성 머리가 다 잘려 나간 마당에 그만두고 싶다고 어떻게 그만둘 수 있다는 건지…….
한번 웃고 나니까 자꾸 웃음이 나왔습니다. 저는 머리카락이 잘려 나갈 때마다 너무나 시원하여 옆에 앉은 사형과 달리 계속 싱글벙글 웃어댔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정말 세상 모르는 철부지였고, 사형은 조숙하고 감수성 예민한 분이었지요.
“이 머리카락은 무명초(無名草)이다. 없을 무, 밝을 명, 풀 초의 무명초. 무명이란 어둠, 무지란 뜻이며, 머리카락을 자르는 이 삭도는 지혜의 칼날이니 어둠을 베어버리고 지혜의 길을 가는 것이 바로 삭발의 의미임을 명심해라.”
잘라낸 긴 머리를 한지에 싸 밀쳐둔 뒤, 스님은 삭도를 집어 들며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위로 듬성듬성 자르고 남은 머리를 막 삭도로 밀려는 순간이었죠.
“앞머리부터 깎으면 앞길이 훤해지고, 뒷머리부터 깎으면 중노릇을 잘하게 된다.”
스님은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앞머리부터 밀어주셨습니다. 앞길이 환하라고 축원을 내려주신 거죠.
삭발을 끝낸 뒤 법복을 갈아입은 저는 신바람이 나서 법당에 올라가서 부처님께 절하고, 다시 스님들께 돌아가며 절을 올렸습니다. 법복을 어설프게 입은 채 날아갈 듯 좋아 싱글벙글 웃고 있는 제게 스님은 그제야 대견해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눈길을 주셨지요.
“꼭 아난존자(부처님의 10대 제자 중 한 사람) 같구나.”
스님은 그때 그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스님. 기억하시는지요? 삭발하고 반년이나 지났을까 싶던 무렵, 제가 심한 몸살감기에 걸려 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고 정신이 희미해져 물 한 모금 못 마실 정도로 아팠던 적이 있지요.
“너무 신경을 쓰고 몸이 허약해져 있으니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잘 먹어야 합니다.”
의사의 말을 들은 스님은 깜짝 놀라시며 어느 정도 허약하냐고 다시 물으셨지요. 병원에서 나와 절까지 걸어 올라가는 동안 스님은 제 손을 꼭 잡으며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신경 쓸 일이 뭐가 있느냐? 내가 이렇게 옆에 있는데, 너는 마음 푹 놓고 잘 먹고 잘 자라면 된다.”
그날 스님은 동네 가까이 사는 어느 보살님께 소꼬리를 고아달라고 부탁하셨지요. 그러나 스님이 그렇게 지극히 정성을 들였는데도 저는 그 국을 도저히 삼키지 못하고 토해 버렸습니다. 안타까워하시며 스님은 몇 번이나 “맛으로 적지 말고 몸 생각해서 꾹 참고 마시라”고 권하셨지만 끝내 저는 그 국물을 마시지 못하고 말았지요.
그날 밤, 끙끙 앓다가 잠이 든 저를 스님은 늦게까지 지키고 앉아 계셨습니다. 그때 제 손을 잡고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며 기도하시던 스님의 눈에 맺혀 있던 눈물방울. 어린 나이에 머리를 깎은 제가 스님은 애처로우셨던 모양입니다.
눈을 든 제게 스님은 “아가, 아프지 마라. 어서 일어나야지. 일어나면 맛있는 것 사줄게. 뭘 사줄까?”하고 물으셨지요. 철없던 제가 그때 했던 대답을 스님은 아마 기억하지 못하실 겁니다.
아픈 와중에도 저는 대뜸 “박카스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아파서 누워 있는 아이가, 그것도 출가해서 머리까지 깎은 승려가 그 와중에 박카스가 먹고 싶다고 대답했던 걸 생각하면 얼마나 기가 차는지……. 세월이 흐른 지금, 그때를 떠올리면 스님도 아마 미소를 지으시리라 생각됩니다. 며칠 뒤 스님은 정말 박카스를 한 병 사주셨고, 용돈까지 주셨지요.
열여섯 살 철부지 동자를 엄마가 아기 키우듯 보살펴주시면서 스님은 그렇게 제게 끝없는 사랑을 쏟아주셨습니다. 제가 아플 때 기도하시던 스님의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코끝이 찡해집니다. 그런 사랑을 받은 제가 스님께 뭘 해드렸나 생각하면 가슴 한끝이 아릿해 오기도 합니다. 자라는 동안 스님은 저희에게 이런 말씀을 들려주셨지요.
“아픈 환자를 돌보는 것이 공덕 중에 가장 큰 공덕이라 했으니 너희도 살아가다가 누군가 아픈 이를 만나면 부모와 형제를 돌보듯 해야 한다.”
어쩌면 스님과 그런 가르침이 저를 한동안 병원에 있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던 시절, 제 가슴속엔 언제나 스님의 말씀이 메아리치고 있었습니다.
돌봐줄 자식이 없는 83세 할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해 계시던 일이 생각나는군요. 할아버지를 간병한 유일한 사람은 79세의 할머니였습니다. 두 분 다 노인 중에서도 상노인인데 한 분은 환자고, 한 분은 보호자였으니 사실 누가 환자인지 모를 정도로 딱한 형편이었지요.
할머니 또한 관절염으로 고생하고 계셨고, 할아버지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시트 위에 똥을 흘려놓곤 하시는 바람에 담당 간호사들이 매번 시트를 갈아줄 수도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병원 법당의 법사로서 병실을 매일 한 번씩 돌던 저는 빠뜨리지 않고 할아버지를 찾아갔는데, 제가 병실 문을 열면 두 분은 반색하시며 시트를 갈아달라고 하셨지요.
입고 있던 승복 두루마기를 벗어젖히고 시트를 갈아드리고 몸도 깨끗이 닦아드리면 그분들은 그렇게 행복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또 스님을 떠올렸습니다. 어린 시절 제가 아플 때 스님이 보여주신 사랑의 힘, 저를 키워주신 스님의 사랑이 그분들 위로 겹쳤던 것입니다.
제가 오기를 매 순간 기다린다는 두 분의 주름진 얼굴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파져 왔습니다. 절에 가지 말고 함께 있으면 안 되느냐고 매달리실 때는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무슨 인연인지 할아버지의 임종을 저와 할머니 둘이서 지키게 되었는데, 다음 날 난데없이 미국에 살고 있다는 할아버지의 자녀 셋이 들이닥치더군요. 그때까지 저는 그분들에게 자식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말입니다. 참으로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버지의 시신을 앞에 두고도 재산 이야기만 하는 그들을 보며 저는 명문 대학이니 좋은 가문이니 하는 것들이 다 부질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지요.
사람 몸으로 태어나기 어렵고, 마음 씀씀이가 대장부 같기 어렵고, 참된 진리 만나기는 더욱 어렵다고 했는데, 사람으로 태어났어도 사람 같지 않은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저는 세상 속에서 많이 보아왔습니다.
스님, 저 역시 젊은 날, 스님 속을 많이 썩였습니다. 그런데도 스님은 끝까지 저를 사랑으로 감싸주시고 기다려주셨지요. 아무리 제가 잘못해도 누군가가 제 칭찬하면 좋아하셨고, 누군가가 제 험담하면 따끔하게 그 사람을 나무라곤 하셨지요.
열일곱 살 때로 기억됩니다. 사월 초파일에 제가 저질렀던 일을 스님도 기억하고 계시겠죠? 초파일이 되면 신도들은 연등, 팔각등, 수박등, 주름등과 같은 형형색색 곱고 예쁜 등을 달았지만, 가난한 노보살님들은 법당 안에 다는 연등을 달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등과 달리 그 당시는 연등 제작 과정이 대단히 복잡하고, 하나하나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야 해서 다섯 달 가까이 수많은 사람이 달라붙어 오직 연등 만드는 데 시간을 바쳤습니다. 당연히 등을 많이 만들 수도 없었을 뿐 아니라 비용도 많이 들었는데 그런저런 사정을 잘 몰랐던 어린 저는 등을 다는 데도 차별이 있다는 것이 속상하기만 했습니다.
사건은 스님이 외출하신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할머니들이 원하는 대로 법당에 연등을 달아드리지 못하고 마당에 팔각등이나 주름등을 다는 것이 속상했던 저는 스님이 안 계시는 동안 등의 종이를 뜯어서 태우고 팔각등 재료인 철사 뼈대를 모두 망가뜨려 없애버렸지요.
저녁 늦게 야단맞을 각오를 하고 스님께 연등만 빼고 다른 것은 모두 없애버렸으니 내년에는 시주를 얼마를 하건 상관없이 모두 연등을 달아드리자고 했습니다. 당연히 불호령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스님은 잠시 저를 올려다보시다가 갑자기 픽 웃으시면서 “할 수 없지. 내년에 새것으로 장만해야지”라는 한마디로 제가 한 일을 꾸지람 한번 없이 인정해주셨습니다.
그때 스님이 보여주신 마음의 크기가 저를 자라게 했습니다. 한평생 청정한 걸음 보여주신 스님의 가르침이 저를 바른길로 인도했습니다. 세월은 갔지만 삭도를 들며 스님이 하신 말씀, 아직 귀에 쟁쟁합니다.
“이 머리카락은 무명초(無名草)이다. 없을 무, 밝을 명, 풀 초의 무명초. 무명이란 어둠, 무지란 뜻이며, 머리카락을 자르는 이 삭도는 지혜의 칼날이니 어둠을 베어버리고 지혜의 길을 가는 것이 바로 삭발의 의미임을 명심해라.”
이 글을 쓴 것이 엊그제 같은데 스님은 이제 세상을 떠나셨고 빈자리엔 그리움이라는 이름의 향기만 남아 그윽합니다.
글 출처: 사랑은 사랑으로 돌아옵니다(정목스님, 감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