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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이 가난할 때 / 버텨온 시간은 전부 내 힘이었다

오작교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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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기분이 나쁠 때가 있다. 친구가 던진 농담에 미간을 찌푸리고, 내 말을 한 번에 못 알아듣기만 해도 짜증이 솟구친다. 저 사람은 왜 무단횡단을 하는 거지? 진짜 죽고 싶은 건가? 앞차가 늦게 가는 바람에 신호라도 놓치면 솜 주먹을 꾸욱 말아 쥐고 어금니를 깨문다. 마음이 가난할 때 나타나는 증상이다. 마음의 빈곤은 통장 나머지가 바닥났을 때와 같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세상만사가 짜증 난다. 그러다가 갑자기 울분이 터져 울음을 쏟아내기도, 애꿎은 사람에게 화를 내기도 한다. 왜 이럴까. 어쩌다가 이렇게 돼버렸을까. ‘시발’이라는 단어를 입 안에 머금고 굴리다 겨우 삼켜낸다.

   잘하고 있는데도 혼자 시간 밖으로 밀려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내가 하는 행동이 모나 보이고 진심을 다했음에도 한없이 부족한 것 같을 때, 내 안의 천사와 악마가 있다면 악마에게 모든 걸 빼앗기고 만 상태에서 나는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에게 침을 튀기고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때로는 엉망인 내 상태를 들킬까 봐 선의의 거짓말을 한다.

   “나 요즘 엄청 좋아. 저번 주말에는 뭐 했어? 예전에 말한 건 괜찮고?”

   괜찮지 않은 내가 묻는 안부는 가림막에 불과하다. 이 부정을 절대 전염시키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그러면서도 아등바등 사는 나를 누가 좀 알아봐 주고 다독여줬으면 싶다. 모순에 모순이 더해져 망가진 감정 상태가 무르익으면 내가 경멸스러워 코가 시릴 정도다. 그때 알았다. 예민함의 끝에 도달하면 그냥 눈물이 나오는구나. 너무 나약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구나.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잡념에 빠지다 늦은 새벽에 겨우 잠이 들고 아침에 일어나 표독스러운 피로를 느끼며 하루를 시작하는 나에게 더 이상의 방도는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점심을 먹고 일하다 허공을 응시하면 빨리 감기를 하듯 시간은 흘러갔다. 그러다 책상에 있는 노트에서 예전에 적어놓은 한 명언을 발견한다.
 
“예민한 마음은 상처받기 쉬우나,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이기도 하다.”
-엘리자베스 길버트(Elizabeth Gilbert)


   손이 닿는 대로 자국이 남을 것 같은 물렁한 나는 나약한 동시에 가장 감성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릴스에 뜬 사별 영상을 보고 얼마나 울었던지. 인류애가 조금이라도 느껴진다면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고, 노을 지는 한강을 바라보며 운전할 땐 이 순간이 영원하길 바라며 달리던 속도를 늦추기도 했다. 나에게 무엇이 필요할까? 넉넉한 돈인가, 안정된 사랑인가, 아주 긴 휴식인가. 아무것도 내 뜻대로 할 수 없으니 답답한 건 여전하다.

   다음 날에는 여행지에서 만난 유기견이 자신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을 죽을 듯이 뒤쫓는 영상을 봤다. 차를 따라오는 말티즈를 도저히 보낼 수가 없어 가슴에 품은 그 사람. 그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그 아이 하나만 보고 살았을 텐데…. 샤워를 하다 빈 샴푸통을 만지작거렸다. 새로 살 땐 조금 더 상큼한 걸 사볼까? 달걀부침을 3개나 해 먹으며 문어와 인간의 우정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고, 해진 파자마를 입고 피아노를 쳤다. 엄마한테는 아직 힘들다고 말하지 못했고 달리기하며 흔들리는 나무를 바라봤다.

   SNS를 보며 몇 번 한숨을 쉬었고, 회사에 생긴 귀찮은 일을 내가 도맡아 하기로 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니 더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슬픈 영상을 보고 눈물이 나지 않으면 홀로 괜찮아졌다고 판단하는 편이다). 뒤차가 빵빵거려도 라디오 소리에 더 귀를 기울였고, 친구가 말귀를 못 알아들으면 짜증 대신 상냥함을 보였다. 가난했던 내 마음이 어떻게 다시 부를 이루었는지, 어느 날은 천장을 보면 생각했다. 도망치지 않고 살았으니 가여운 내게 신이 선물을 주신 게 아닐까.

   인생이 아무리 롤러코스터라고 해도 가끔은 심해까지 내려가는 내가 두렵다. 하지만 그냥 살아만 내어도 다시 올라오는 게 인생이니 하루를 충실히 보내기만 해도 다시 궤도를 되찾을 수 있다. 어떠면 마음의 가난은 내가 만들어낸 허상일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마음의 부도 없는 것이니 인생사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가 아닐까. 생각난 김에 빈 종이에 단어를 적어본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인생사 빈속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떠나니
지나치게 탐하지 말고 내 사람들에게 친절해 보이자.

   마음을 비우니 그제야 채워지는 느낌이 든다. 비울수록 채워진다는 뜻이 이런 것이구나. 앙상한 가지만 무성했던 마음이 비로소 숲이 된 기분이다. 겨울이 지나 봄이 오는 것처럼 날이 따스워지면 내 마음은 파릇한 잎사귀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이것은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섭리니 내 예민함도, 불행도, 슬픔도 머지않아 사라진다.

   구제 불능 같았던 삶이 어쩐지 사랑스러워지는 느낌이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니 그제야 공기가 맑다.

글출처 : 버텨온 시간은 전부 내 힘이었다(신하영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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