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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깔 좋은 도자기를 보면

오작교 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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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 안거를 마친 바로 그 다음 날, 남쪽에 내러가 열흘 남짓 이곳저곳을 어정거리며 바람을 쏘이다 왔다. 변덕스런 날씨 때문에 꽃이 필 만하면 갑자기 추위가 닥쳐 겨우 피어난 꽃에도 꽃다운 생기가 없었다. 매화도 그렇고 수선도 그랬다.

  풋중 시절부터 나는 안거가 끝나고 해제가 시작되는 바로 그날 누가 어디서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일찍 길 떠나기를 좋아했다. 미적미적 미루다가 김이 빠져나간 후에 길을 떠나면 나그넷길의 그 신선감이 소멸되고 만다.

  선원에 다니던 시절에는 후원에서 미리 아침공양을 대충 때우고 첫차를 타기 위해 걸망을 메고 동구길을 휘적휘적 나서면 새벽달이 숲길을 훤히 비춰 주었다. 이 또한 해제의 일미(一味)이다. 만일 첫차가 아니고 두 번째 차편이나 밝은 대낮에 길을 떠나면 해제의 그 맛이 시들해진다.

  남쪽에서 꽃을 만나고 돌아오니 이곳은 갑작스런 폭설이 내렸다. 기상 용어로 ‘북동기류의 영향’으로 이름 그대로 춘설이 난분분했다. 꽃 대신 서력ㅇ산수를 펼쳐 보인 것이다. 오랜만에 나무마다 소복소복 쌓인 눈이 포근한 봄기운을 느끼게 한다. 얼어붙었던 개울도 가장자리만 남기고 녹아 흐르는 물소리가 덕지덕지 쌓인 겨울의 찌꺼기들을 씻어 내는 것 같다.

  한바탕 쓸고 닦아 낸 후 지고 온 짐을 풀었다. 새로 가져 온 오지 물병을 창문 아래 놓아두고 벽에 기댄 체 이만치서 바라보고 있으니 내 안에서도 봄기운이 움트는 것 같았다. 이 오지 물병은 목이 길어 학처럼 늘씬한 몸매다. 자꾸만 눈길이 간다.

  보성 미력옹기의 이학수 님이 나를 위해 비어 준 것인데 그 사연은 이렇다. 작년 가을 불일암에 사는 스님들과 함께 보성 차밭에 가는 길에 미력옹기에 들었었다. 스님들은 이것저것 소용될 그릇들을 고르고 나는 찻물을 담기 위한 물병을 하나 골랐었다. 그릇은 마음에 들었지만 그 용량이 적은 게 아쉬웠다. 이런 뜻을 알고 주인이 나를 위해 좀 큰 것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이번에 들렀더니 비슷비슷하게 만든 두 개를 내주며 다 가져가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중 작년에 구해 온 것과 같은 형태의 것 하나만을 골랐다. 두 개를 갖게 되면 하나만을 지녔을 때의 그 풋풋함과 살뜰함이 소멸되고 만다. 이것은 내 지론이다. 어떻게 두 개를 똑같이 사랑할 수 있겠는가.

  내 독자이기도 한 주인에게 부끄럽지만 그 자리에서 내 심경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요즘에 이르러 이것저것 세속적인 욕심은 어느 정도 빠져나간 것 같은데, 때깔이 고운 그릇을 보면 아직도 곁에 두고 싶은 생각이 인다고. 함께 웃었다.

  이런 내 ‘욕심’은 얼마 전 곤지암의 보원요에서도 발휘되었다. 이따금 보원요에 들르면 지헌님은 쌀과 콩, 무, 김치 등 오두막에 소용될 것들을 이것저것 챙겨 주어 그때마다 염치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도 대청마루에 놓은 그릇들을 보다가 단정하게 빚은 다완을 매만져 보았더니 주인은 내 마음을 읽고 선뜻 싸서 주었다. 말차 다완으로 두어 번 쓰다가 초를 넣어 불단을 밝혔더니 은은한 그 불빛이 부처님 모습과 매우 잘 어울렸다.

  가끔 이당도예원에 들를 때도 이런 내 옥심은 멈추지 않는다. 한번은 오래전에 만들어 작업실 한쪽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필통에 눈길이 닿자 먼지를 털어 얻어 오기도 했다.

  언젠가는 때깔이 고운 도자기 앞에서도 욕심을 부리지 않고 무심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아마 내 삶도 탄력이 느슨해질 것이다.

글출처 : 아름다운 마무리(법정스님 : 문학의 숲) 中에서.....
 

  
2012.03.05 (10:04:09)
[레벨:9]id: 귀비
 
 
 

허술하게 덮은 지붕에

비가 새듯이

수행이 덜된 마음에는

욕망의 손길이 뻗치기 쉽다..

 

마음공부한다면서도 늘 제자리 어떤 때는..

뒷걸음으로 가고 있어 부끄러울때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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