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번쩍 뜨인 차(茶)
도서명 | 텅 빈 충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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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종일 봄비 소리를 들었다. 창밖에 부슬부슬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앉아 있으니, 산방의 촉촉한 한적(閑寂)이 새삼스레 고맙게 여겨졌다. 이런 때 차를 안 마실 수가 없다. 초하룻날 지리산에서 종대 스님이 보내온 차를 오늘 비로소 시음했다.
불일회보와 출판 일을 보고 있는 현장법사(나는 그를 이렇게 부르는 것이 습관화되었다)가 제주도를 다녀오는 길이라면 아침나절에 들렀었다. 인도에서 세계적인 차의 명산지인 다지링과 스리랑카의 차밭이며, 가는 데마다 눈에 띄는 일본의 차밭과 남제주 도순에 있는 차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차를 마셨다.
점심 공양을 마치고 쉬는 시간인데, 큰절에서 강원의 중강(中講)으로 있는 한 스님이 세배하러 올라왔다. 오늘이 초사흘인데 마음에 걸렸던지, 가사 장삼을 싸들고 빗속을 올라온 것이다. 강원의 교과과정이며 새로 입산한 행자들의 교육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차를 마셨다.
오후 네 시쯤 되어 ‘스님 계십니까’하는 소리에 문을 열어보니 아랫마을에서 낙죽(烙竹)으로 기능보유자의 수업을 하고 있는 김군이 오랜만에 찾아왔다. 얼마 전 필리핀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으면서 함께 또 차를 마셨다. 김군은 자기 집에서는 지금 마시는 이런 차맛이 안 난다고 하며 서너 잔을 연거푸 마셨지만, 나는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그저 마신 척했을 뿐이다.
오늘은 근래에 드물게 이와 같이 네 차례나 차를 마셨다. 뭐니 뭐니 해도 혼자서 한가롭게 차를 마시고 있을 때, 차의 향기와 맛과 그 빛깔의 싱그러움을 온전히 음미할 수 있다.
가끔 갖게 되는 생각이지만, 이런 산중에 살면서 차가 없다면 얼마나 뻑뻑하고 삭막할까를 헤아리게 된다. 마음이 지극히 한적할 때 마시는 차는 말 그대로 감로미(甘露味)가 아닐 수 없다. 지금 마시고 있는 차를 누가 만들었는지 그 만든 사람에게 고마운 생각이 ㅇ저절로 든다. 이런 때는 다기(茶器)의 감촉도 새롭다.
그리고 일을 한 가지 끝내고 나서 홀가분한 기분으로 마시는 차도 감미롭다. 기분전환을 위해서는 드는 한두 잔의 차는 사뭇 유쾌하다.
차를 알 만한 사람과 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마시는 차 또한 즐겁다. 차에 대한 책을 읽은 때는 문득 차를 마시고 싶어진다. 아마 술꾼들이 술에 대한 문헌을 펼쳐들 때에도 그러리라 여겨진다.
누가 선물을 보내올 때, 내 경험에 의하면 차나 다기에 대한 선물이 그중 반갑고 고맙게 여겨진다. 맑고 향기로운 마음이 담긴 물건이기 때문에 그런지 부담스럽지가 않아서 좋다.
온ㄹ 같은 경우 세 번째와 네 번째 자리에서 드는 차는 손님을 위한 의례적인 것이므로 내게 있어서 차맛은 별로다. 의례적으로 마시는 차는 그저 덤덤할 뿐, 그리고 차맛을 잘 모르는 사람들과 차를 마시는 일은 차에 대한 결례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그런 사람에게는 그 구미에 알맞은 구수한 현미차 같은 것을 마시게 하는 것이 제격일 것이다.
그가 차맛을 제대로 아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간단하게 알아볼 수 있다. 대개의 경우 씁쓸한 맛을, 어떤 사람들의 표현에 따르면 시래기 삶은 물 같은 맛을 보고 나서 한잔 더 마시겠느냐고 물으면 ‘아니 되었어요’라든가 ‘그만 할래요’라고 온몸으로 거절하는 동작을 짓는다. 만약 이런 사람에게 일급차를 내놓았을 때, 차가 얼마나 아까운지를 후회하게 될 것이다.
내가 처음 녹차를 본 것은 20대에 갓 입산 출가한 행자시절이었다. 경남 통영군 산양면에 있는 미륵산 미래사에서였다. 결제일과 해제일에 정례적인 법문이 있었는데, 조실(祖室)인 효봉 선사가 법상에 오르면 원주 스님의 찻잔에 차를 따라 법상 한쪽에 올려놓았었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어느 날 선사께서 법문을 하시다가 찻잔에 입을 대기가 무섭게 ‘차가 너무 쓰다’라고 하면서 찻잔을 그대로 내려놓았던 일이다. 그대의 원주도 차가 무언지도 잘 모르면서 맛도 향기도 없는 해묵은 차를 펄펄 끓는 물에 한 주먹 듬뿍 넣어 우렸던 모양이다.
그날 법문 끝에 찻잔을 치우면서 맛을 보았더니 그저 ‘쓰디쓴 물’이었다. 이 쓰디쓴 물이 금생에 내가 처음 맛본 차맛인 셈이다. 그 뒤로는 두 번 다시 그토록 쓰디쓴 물에 입을 대지 않았다.
1960년, 그러니까 4·19 학생의거가 일어난 해였다. 운허 스님을 모시고 통도사에서 불교사전 카드를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점심 공양 끝에 이따금 차를 마셨는데, 차 시중은 운허 노스님 방 시자인 용문이란 행자가 들었었다. 열대여섯쯤 된 마음씨 좋은 아이인데, 지금 남은 기억에도 늘 땀을 뻘뻘 흘리면서 뛰어다녔고, 옷이 땀에 절어 있어 빨래 좀 자주 해 입으라고 잔소리를 해준 일이 떠오른다.
이 아이가 차 시중을 들었는데, 펄펄 끓는 알루미늄 주전자에 찻잎을 듬뿍 넣어 가져오곤 했었다. 그대의 우리도 차가 무엇인지, 차를 어떻게 우리는지 잘 몰랐기 때문에 그 쓰디쓴 물을 한 컵 가득 홀짝홀짝 마셨던 것이다. 중국서 건너온 재스민차를 주로 마셨던 것 같다.
차를 제대로 알게 된 것은 60년대 말 봉은사 다래헌에서였다. 동국역경원이 개설되는 바람에 그 일을 거들기 위해 거기 머물렀던 것이다. 판전(版殿) 아래 있는 별당(別堂, 그전까지 별당으로 불렀었다)에 법안 스님과 내가 들어가 살면서 집 이름을 다래헌이라고 새로 지어서 부르게 되었다.
마침 그곳에는 좋은 샘이 있었다. 감로천(甘露泉)이라고 언제 누구ㅏ 새겨놓았는지 그 샘의 이맛돌에 음각으로 새겨 있었다. 그 무렵의 다기(茶器)는 해인사 동구의 토우(土偶) 선생이 만든 것이 몇몇 스님들 사이에 나뉘어졌고, 차는 지리산 조태연 씨 집에서 나오는 것을 가장 상품으로 쳤었다.
그 다래헌 시절에 마셨던 차 중에서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차는, 태백산 도솔암에서 일타 스님이 사자 편에 보내온 차였다. 그때 차와 함께 보내온 사연은 대충 이랬다. 전라도에 사는 비구니가 소량의 차를 손수 말들어왔는데, 차맛이 좋아 스님 생각이 나서 밖에 나가는 시자 편에 조금 보낸다는 내용이었다.
그해 맨 처음으로 따서 만든 차인 듯, 아주 섬세한 세작(細雀)이었다. 가장 좋은 차가 각ㅈ추고 있는 빛과 향기와 맛을 두루 갖춘 말고 향기로운 차였다. 어린애 살결에서 나는 배릿한 젖비린내 같은 그런 향취가 밴 차였다. 그 후 처에 관한 여러 문헌에서 이 향취가 바로 ‘다신(茶神)’이고 ‘진향(進香)’임을 확인하면서 그 차가 아주 좋은 차임을 거듭 알게 되었다.
7, 8년 전이던가, 부산의 금당 최규용 선생이 조계산에 오면서 가져온 용정차의 맛을 또한 잊을 수 없다. 중국을 다녀온 친지가 보내온 차라고 하면서 납작한 여행용 차통에 담긴 차를 내놓았었다.
용정차도 그 등급이 여러 가지인데 바로 그해에 만든 상품차였다. 그들의 표현대로 하면 극품(極品)이었다. 다른 차와는 달리 네댓 번을 우려도 한결같이 산뜻한 맛이었다. 그 후 많은 용정차를 마셔보았지만 그때의 그런 차맛은 아니었다. 일본에서 만든 차는 개개 그 제다(製茶)의 연월을 밝히는 것이 상례인데, 중국 사람들은 제다 연월을 밝히지 않아 햇차인지 묵은 차인지 마셔보기 전에는 도무지 분간할 수가 없다.
지난해 늦가을 여수 현정이네 집에서 그 집 주인인 월경 거사와 함께 마신 차가 근년에 마신 차 중에서는 다신(茶神)이 밴 좋은 차였다. 무심코 찻잔을 들다가 그 차향기에 눈이 번쩍 띄었다. 이 차를 어디서 구했느냐고 물었더니 어떤 스님이 가져온 차라고 했다. 열 봉지를 구했는데 차맛이 좋다고들 해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다 나누어주고 바닥에 남은 것이 마지막 것이라고 했다.
오늘 아침 시음한 차가 바로 그 차다. 종대 스님이 이 말을 전해 듣고 자기가 마시려고 남겨둔 차를 두 봉지 보내온 것이다. 그런데 그때 그 맛이 아니었다. 우려낸 찻잎을 살펴보니 그때 마신 그 차인 것은 틀림없는데, 엽록소가 많이 사라져 다신(茶神)의 그 귀한 향취가 없었다. 아마 보관상태가 안 좋았던 모양이다. 차의 변질을 막으려면 냉동실에 보관해야 한다.
한 잔의 향기로운 차를 대할 때 나는 살아가는 고마움과 잔잔한 기쁨을 함께 누린다. 행복의 조건은 결코 거창한 데에 있지 않다. 말고 향기로운 일상 속에 있음을 한 잔의 차를 통해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터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