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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메아리

오작교 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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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물소리 바람소리

    봄의 꽃자리에 연둣빛 신록이 싱그럽게 펼쳐지고 있는 요즘, 남도(南道)의 절들에서는 차 따기가 한창이다. 옛 문헌에는 곡우(穀雨)를 전후하여 다는 차가 가장 상품이라고 했는데, 우리 조계산에서는 그 무렵이면 좀 빠르고 입하(立夏) 무렵에 첫 차를 다는 것이 가장 알맞다.

    이곳 선원에서도 엊그제 한 차례 따다가 볶았고, 오늘 대중들이 나가 또 한 차례 따왔다. 예년 같으면 나도 아랫마을 사람들을 몇 데리고 따로 차를 땄을 텐데, 올봄에는 하는 일이 많아 짬이 없을뿐더러 이제는 대중 속에 섞여 살게 되었으니 나누어 주는 한몫으로 족할 수밖에 없다.

    찻잎이 펼쳐지는 걸 보면 하루가 다르다. 그래서 바쁜 일에 쫓기다 보면 하루 이틀 사이에 적기(適期)를 놓치고 말 때가 더러 있다.

    몇해 전까지만 해도 우리 고유의 녹차(綠茶)에는 별로 관심들이 없어 절에서도 극히 소수의 스님들만 즐겨 마셨다. 그러나 요즘에 와서는 차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 안 마시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 특히 선원에서는 졸음을 쫓고 맑은 정신으로 정진하기 위해서라도 많이 마시고 있다. 물론 기호식품이란 굳이 약리적인 효과를 노리고 즐기는 것은 아니다. 차의 향기와 맛과 빛깔을 음미하고 그릇을 만지는 그 일 자체가 삶의 여백처럼 은은해서 즐거운 것이다.

    요즘 우리 고유의 전통차에 대한 관심의 바람을 타고, 경향 각지에서 차의 붐이 일고 잇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하지만, 때로는 일없는 사람들이 너무 극성들을 떠는 바람에 담박하고 순수한 차맛에 어떤 흠이 가지 않을까 싶다.

    차 좀 마시는데 뭐 그리 절차가 까다롭고 복잡한지, 차와 그릇은 진즉 구해 놓고도 마실 엄두를 못 내고 있다는 말을 더러 듣는다. 누구나 마시다 보면 자기 나름의 요령이 생기게 마련이다. 밥 먹는 법 따로 배우지 않더라도 밥 먹을 줄 알고, 술 마시는 법에 대해서 강의 같은 것 듣지 않더라도 술만 잘들 마시던데 뭐.

    그러나 먼저 사셔보았다고 해서 제발 극성들 떨지 말아 달라는 소리다. 큰길에는 문이 없듯이, 다도(茶道)에도 또한 문이 있을 수 없다. 배고픈 사람 밥을 먹듯이, 차를 마시고 싶으면 조용히 마실 뿐이다.

    차를 따거나 그걸 볶을 때면, 자칫 차도둑이 될 뻔했던 기억이 문득 되살아난다.

    몇 해 전 차 딸 무렵에 있었던 일이다. 해마다 송광사에서는, 한국 불교를 중흥시키고 이 도량을 새롭게 일으킨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 스님의 추모재(齋)를 지낸다. 스님의 재일(齋日)인 음력 3월 26일을 기해 사흘 동안 큰 법회가 열리기 때문에 전국에서 많은 스님과 신도들이 모여든다. 따라서 산중은 전에 없이 붐비고, 이 절에서 사는 스님들은 일 년 중에서도 가장 바쁘고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그른 북새통에 무엇을 가지러 불일암에 올라갔더니 굴뚝에서 때 아닌 연기가 피어올랐다. 웬일인가 싶어 부엌에 들어가 보았었다. 낯이 익은 노(老) 여승이 할머니 한 분을 데리고 차를 따다가 볶고 있는 참이었다. 일손이 바빠 큰절이고 암자고 우리는 아직 차를 따지 않고 있는데, 아무 말도 없이 객(客)이 와서 먼저 차를 따가는 걸 보니 속으로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아무개 하면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정도로 주책이 없는 사람을 보고 탓할 수도 없어, 다 볶으면 차 좀 주고 가라고 했더니 한마디로 못 주겠다고 거절이었다.

    ‘남의 차밭에서 주인이 손도 안 대 차를 따다가, 남의 솥에 나무까지 들여 볶으면서도 못 주겠다니 심히 괘씸한지고. 어디 못 주고 가는가 한번 보자.’고 나는 속으로 별렀다.

    차를 다 볶고 나자 그는 신문지에 싸서 가져가려고 했다. 차의 섬세한 성품을 아는 처지에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사람보다도 차를 위해서였다. 차통을 몇 개 꺼내 주면서 거기에 담아가라고 했다. 마루에 볶은 차를 식히느라 널어놓은 채 우물가로 손을 씻으러 간 것을 보고, 기회는 이때다 싶어 나는 서둘러 반통쯤 차를 담아 슬쩍했다.

    그래놓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는 이 차를 마실 때마다 갈데없는 ‘차도둑’이 될 판이었다. 왠지 개운치가 않았다. 이슬방울처럼 맺힌 다이아 목걸이도 아닌 맑은 차를 가지고 좀도둑이 될 수야 없지 않은가. 슬쩍 챙겼던 차를 다시 비워 버렸다. 개운한 마음이었다.

    노 비구니는 우물에서 올라오자 무슨 생각에서였던지 차통을 하나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아까는 못 주겠다고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을 하더니 차를 주겠다고 차통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내놓은 차통에 그는 하나 가득 담아 내 몫으로 내놓고 큰절로 내려갔다.

    나는 그때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오묘한 이치를 전존재로써 느낄 수가 있었다. 만약 반통쯤 담은 그 차를 슬쩍하고 말았더라면 그의 닫힌 마음을 끝내 열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비워버린 바람에 그의 마음이 열린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이렇듯 메아리와 같은 것.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마음과 마음기리는 서로 보내고 받아들여 메아리치는 것이다.

    반쯤 담았던 것을 비우고 나니 가득 채워서 주는 이 응답. 두고두고 차도둑이 될 뻔 하다가 한 생각 돌이키니 이처럼 떳떳하게 선물로써 받게 된 것이다.

    어디 이런 차뿐이겠는가. 세상일이란 모두가 마음과 마음기리 주고받는 메아리다. 미운 마음으로 보내면 미운 마음으로써 응답이 오고, 어진 마음으로 치면 어진 마음으로 울려온다. 아지 못해 건성으로 건네주면 또한 저쪽에서도 마지못해 건성으로 되돌아온다. 크게 소리치면 크게 울려오고, 작게 소리치면 작게 울려오는 것이 또한 메아리의 성질이다.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것은 지극히 작은 한 모서리에 지나지 않는다. 마음의 세계야말로 털끝만큼도 어김이 없는 질서다. 눈은 가릴 수도 속일 수도 잇다. 저마다 다른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러나 마음은 절대로 가릴 수도 속일 수도 없다. 마음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부분이 아니라 전체다.

    그 스님이 주고 간 차를 마실 때마다 혀끝에 닿는 맛은 별로 없었지만, 마음이 실상을 음미하는 그런 계기가 되었다. 사람기리 주고받는 일의 뒤뜰을 넘어다보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재윤이네와 욱이네한테 햇차가 나오면 보내주기로 했는데, 올해는 일이 바빠 하는 수 없이 말빚을 지게 되었다. 차를 만질 여가가 없어 거짓말쟁이가 되고 말았다. 미안하다.

(83. 6)

글출처 : 물소리 바람소리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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