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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보기

오작교 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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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산방한담
    침묵의 숲이 잔기침을 하면서 한 꺼풀씩 깨어나고 있다. 뒤꼍 고목나무에서 먹이를 찾느라고 쪼아대는 딱따구리 소리가 자주 들리고, 산비둘기들의 구우구우거리는 소리가 서럽게 서럽게 들려오고 있다.

    해마다 이맘때면 숲을 찾아오는 저 휘파람새, 할미새가 뜰에 내려와 까불까불 가벼운 몸짓으로 인사를 한다. 저 아래 골짝에서부터 안개처럼 보얗게 새 움이 터서 밀물처럼 산허리로 올라오고 있다.

    머지않아 숲에는 수런수런 신록(新綠)의 문이 열리리라. 그때는 나도 숲에 들어가 한 그루 청정한 나무가 되고 싶다. 나무들처럼 새움을 틔우고 가지를 뻗으면서 연둣빛 물감을 풀어내고 싶다. 가려둔 속뜰을 꽃처럼 활짝 열어 보이고 싶다.

    허허, 이 봄날이 나를 흔들려고 하네.

    귀는 항시 듣던 소리를 즐거워하고 눈을 새로운 것을 보고자 한다는 말은 그럴 법하다. 음악을 듣더라도 귀에 익은 곡만을 즐겨 듣고, 새것을 찾아 눈은 구경거리의 발길을 멈추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니 귀는 좀 보수적이고 눈은 제법 진보적인 셈.

    재작년이던가. 여름날에 있었던 일이다. 날씨가 화창하여 밀린 빨래를 해치웠었다. 성미가 비교적 급한 나는 빨래를 하더라도 그날로 풀을 먹여 다려야지 그렇지 않으면 찝찝해서 심기가 홀가분하지 않다. 그날도 여름 옷가지를 빨아 다리고 나서 노곤해진 몸으로 마루에 누워 쉬려던 참이었다. 팔베개를 하고 누워서 서까래 끝에 열린 하늘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모로 돌아누워 산봉우리에 눈을 주었다. 갑자기 산이 달라 보였다. 하, 이것 봐라 하고 나는 벌떡 일어나, 이번에는 가랑이 사이로 산을 내다보았다. 우리들이 어린 시절 동무들과 어울려 놀이를 하던 그런 모습으로.

    그건 새로운 발견이었다. 하늘은 호수가 되고, 산은 호수에 잠긴 그림자가 되었다. 바로 보면 굴곡이 심한 산의 능선이 거꾸로 보니 훨씬  유장하게 보였다. 그리고 숲의 빛깔은 원색이 낱낱이 분해되어 멀고 가까움이 선명하게 드러나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랐다. 나는 하도 신기해서 일어서서 바로 보다가 다시 거꾸로 보기를 되풀이했었다.

    이러한 동작을 누가 지켜보고 있었다면 필시 미친 중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나는 새로운 사실을 캐낼 수 있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람을 대하거나 사물을 보고 인식하는 것은 틀에 박힌 고정관념(固定觀念)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이미 알아버린 대상에서는 새로운 모습을 찾아내기 어렵다. 아무개하면, 자신의 인식 속에 들어와 이미 굳어버린 그렇고 그런 존재로 밖에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이건 얼마나 그릇된 오해인가. 사람이나 사물은 끝없이 형성되고 변모하는 것인데.

    그러나 보는 각도를 달리함으로써 그 사람이나 사물이 지닌 새로운 면을, 아름다운 비밀을 찾아낼 수가 잇다. 우리들이 시들하게 생각하는 그저 그렇고 그런 사이라 할지라도 선입견에서 벗어나 맑고 따뜻한 ‘열린 눈’으로 바라본다면 시들한 관계의 뜰에 생기가 돌 것이다.

    내 눈이 열리면 그 눈으로 보는 세상도 열리는 법이니까.

    인도의 신비가이며 철학자, 그리고 구루(영적인 스승)인 크리슈 나무르티는 그의 저서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보는 법을 안다면 그때는 모든 것이 분명해질 것이다. 그리고 보는 일은 어떤 철학도, 선생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아무도 당신에게 어떻게 볼 것인가를 가르쳐줄 필요가 없다. 당신이 그냥 보면 된다.’

    그 어떤 고정관념에도 사로잡히지 말고 허심탄회 빈 마음으로 보라는 것. 남의 눈을 빌 것 없이 자기 눈으로 볼 때 우리는 대상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이다.

    차를 즐기는 사람들은 흔히 이런 말을 한다. 어디서 나오는 무슨 차는 맛이 좋고, 어디 차는 맛이 시원치 않다고. 물론 기호에 따라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차맛에 어떤 표준이 잇는 것은 아니다. 형편없는 찻감만 아니라면 한 잔의 차를 통해 삶에 대한 잔잔한 기쁨과 감사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요는 그 차가 지닌 특성을 알맞게 우릴 때 바로 ‘그 차맛’을 알 수 있다. 사람의 일도 마찬가지다. 인격에 고정된 어떤 틀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이 지닌 좋은 덕성(德性)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는 내게 좋은 친구가 될 것이다.

    한동안 나는 그 희한한 광경을 혼자서만 즐길 수 없어, 내 산거(山居)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널리 보여주었다. 나이 많은 노스님이건 어린 사미승이건, 신사와 숙녀를 가릴 것 없이, 나는 마치 숙달된 조교처럼 그들 앞에서 앞산을 거꾸로 내다보는 동작을 해보였다. 그러면 그들도 천진한 어린이가 되어 거꾸로 내다보면서 좋아라 했다.

    이렇다 할 구경거리가 없는 산이라 사물을 보는 또 하나의 시각(視覺)을 통해 함께 즐기곤 했었다. 좀 점잖지 못한 동작이긴 하지만, 여럿이서 그런 놀이를 하고 있을 때의 광경 또한 볼 만한 것이었다. 이런 산중 아니고야 모두가 점잔만 빼는 이 세상 어디에서 그런 동작을 지을 수 있겠는가.

    지난 3월 서울에 갔을 때, 가톨릭 신자인 테레사의 인도로 어떤 수도원을 찾아간 일이 잇다. 수도원이라고 하면 번듯한 건물에 담장이 높고 으레 수위실이 있을 것을 연상한다. 그러나 우리가 찾아간 그 수도원은 동네 끝 야산 아래 잇는 조그만 초가집이었다. 경기도 고양군 중면 일산 9리 밤가시골. 학생들 가슴에 다는 명패만한 크기의 문패. ‘예수의 작은 자매회’라고 빛이 바랜 나무쪽에 씌어 있었다. 그 문패처럼 이 세상에서도 아마도 가장 작은 수도원일 것이다. 마을 집을 사서 들어왔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엔 여느 민가나 다름이 없었다.

    성당은 대청마루, 아무 장식도 없고 벽에 붙인 조그만 감실(龕室)과 그 아래 켜져 있는 호롱불. 재래식 밥상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제대(祭臺)로 쓰이는 것인가. 불란서에서 왔다는 수녀님 두 분과 수련수녀까지 합해서 열 사람도 채 안 되는 조촐한 모임이었다.

    마침 점심시간이 되어 주인과 나그네가 함께 한상에 둘러앉아 구수한 냉이국과 김치에 맛있는 공양을 했다. 처음 찾아간 나그네에게도 전혀 부담을 주지 않는 편안한 집이었다. 이곳 자매들은 마을에 일손이 바빠지면 밭에 나가 일을 거든다고 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에게는 고맙고 가까운 이웃이 되는 모양이다. 조그마한 초가에서 항상 웃음이 넘치는 걸 보고, 수도회의 이름 그대로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로구나 싶었다.

    아마 초기 교회가 이와 같았으리라. 신라 때 일선군 모레네 집을 절도 만들었을 때도 이랬으리라. 그러나 오늘의 교회나 사원은 그 건물만 하더라도 얼마나 호화롭고 비대해졌는가. 건물과 기구가 비대해진 만큼 그 종교가 지닌 본래의 기능이 순수하게 이행되고 있을까. 혹시나 선민의식에 도취, 수도자와 시민들 사이가 물에 기름 돌 듯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산의 밤가시골 초가집 수도원에서 오늘의 교회와 사원을 바라보는 ‘눈’을 나는 그날의 선물로 받아왔다.

    가난하고 소탈하고 그러면서도 평화와 기쁨이 넘치는 자매들의 있음이, 겉치레로 속이 비어가는 오늘 우리에게 빛과 소금이 되었으면 싶었다.
(80. 5)
글출처 : 산방한담 中에서.....

譯註
유장하다 : 1. 길고 오래다. 2. 급하지 않고 느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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