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고장에서 또 한번의 겨울을 나다
도서명 | 오두막 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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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아는 분이 내게 불쑥 물었다.
“스님은 강원도 그 산골에서 혼자서 무슨 재미로 사세요?”
난 그때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대꾸했다.
“시냇물 길어다 차 달여 마시는 재미로 살지요.”
무심히 뱉은 말이지만 이 말 속에 내 조촐한 살림살이가 함축되어 있을 것이다.
올 겨울은 눈 고장에도 눈이 별로 내리지 않았다. 그 이름도 생소한 기설제(祈雪祭)까지 재냈다는데도 눈은 내리지 않았다. 이 고장 사람들 말로는 이런 일은 30년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겨울철이면 눈 치우는 일이 고된 일과였는데 올해는 눈 치우는 데 쓰이는 가래가 알 일이 없어, 눈 대신 개울에서 깨 놓은 얼음덩이를 치우는 데 쓰였다.
농사짓는 사람들은 벌써부터 물 걱정이다. 눈 고장에서는 겨우내 쌓인 눈이 땅 속으로 녹아들어 가뭄을 모르는데, 올 겨울은 눈이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농업용수가 달릴 걸 염려해서다. 우리들이 자초한 전 지구적인 기상이변을 이 산중에서도 실감할 수 있다.
그래도 얼음장 밑으로 맑은 물은 흐른다. 깊은 산중이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도 물을 별로 줄지 않는다. 이 물이 아니면 이 산중에서 살지 못할 걸 생각하니, 흐르는 물에 고마움을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보기 드물어졌지만 옛 절의 부엌문에는 용과 호랑이의 그림이나 글씨가 붙어 있었다. 물과 땔감을 공급하고 주재하는 일종의 수호신이다. 흘러가는 물이지만 물을 함부로 쓰면 용이 화를 내고, 산골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땔감이라도 헤프게 쓰면 호랑이가 노한다고 믿었다. 이 땅위에 있는 자연의 소산을 그만큼 신성시하고 아낄 줄 알았던 우릴 동양인의 심성이었다.
우리가 처음 절에 들어왔던 시절만 하더라도 절에서는 시주물건에 대해 타이르는 말이 가장 많았다. 시주의 은혜를 많이 지면 내생에 그 집 소가 되어 힘든 일로 갚아야 한다는 말을 노스님들로부터 수없이 들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저 겁주려고 한 말이 아니라 그 안에는 털끝만큼도 어김이 없는 무서운 인과의 도리가 들어 있다.
새로 세운 절에서 기회가 있을 때만다 ‘가난한 절’을 내세우는 것도, 될 수 있는 한 시은(施恩 - 시주의 은혜)을 적게 지고 살자는 뜻에서다. 수행자에게는 풍요로운 물질과 편리한 시설이 두려워해야 할 함정이기 때문이다. 풋중 시절에 구참 스님들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사중 소임을 보는 스님들 방에는 반드시 상하로 된 등잔이 있었다. 공과 사가 분명해서 사중 일을 볼 때는 사중 등잔을 켜고, 개인 일을 볼 때는 개인 등잔을 켰다. 그런데 등잔의 위치를 사중 등잔은 하단에 놓고 개인 등잔은 상단에 놓은 것이 상례였다. 왜냐하면 기름을 붓다가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사중 등잔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기름 몇 방울 가지고 쩨쩨하게 뭐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어 귓등으로 흘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것으로 등잔뿐 아니라 매사에 공과사가 분명했고, 개인의 사물보다는 공유물을 끔찍하게 여겼던 그 정신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정신으로 조선조의 갖은 박해 속에서도 오랜 세월 절이 유지되어 올 수 있었고 또한 이런 점이 청정한 승가의 정신이기도 했다.
청정한 승가 정신이 결여된 사람들이 운영하는 절은 절 살림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누구누구라고 그 이름을 들출 것도 없이, 절 재산을 개인의 재산처럼 부당하게 소비하고 탕진한 사람들의 말로는 하나같이 비참하다. 인과의 도리가 어김없음을, 시은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우리 눈앞에 보여주고 있다.
40여 년 전 해인사 학인 시절에 내가 몸소 겪은 일이다. 그 무렵에는 산중 절 어디를 막론하고 전기가 들어오기 전이라 큰방, 작은방 할 것 없이 기름등잔을 켰다. 해가 지기 전에 램프의 등피를 닦고 석유를 채우는 것이 해질녘의 일과의 하나였다.
설 무렵에는 일과를 한 사흘 쉬기 때문에 낮에는 대개 산에 오르고 밤에는 네댓씩 뒷방에 모여 윷놀이나 성불도 놀이를 하면서 왁자지껄했다. 내가 거처하는 방에서도 학인들이 와서 윷놀이를 하고 놀았다.
그때 해인사는 청담 스님이 주지인데 종단 일을 겸임하고 있어 현장에 없는 이름뿐이 부재 주지이고 실질적인 절 운영은 총무인 문성 스님이 맡아 했었다. 문성 스님은 성실한 구참 스님으로 그때 고성 옥천사 주지로 있었는데 청담 스님의 간청으로 해인사에 와 계셨다.
어느 날 아침 공양 끝에 나보고 할 말이 있으니 자기 방에 좀 와 달라고 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총무 스님 방으로 갔더니 그만 소임을 내놓고 가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했다.
“스님까지 그럴 줄은 몰랐소. 시주가 이 산중에 기름을 올려 보낼 때는, 그 등불 아래서 부지런히 정진해서 중생을 교화해 달라는 간절한 소원에서일 것이오. 그런데 그 시주의 등불 아래서 윷판을 벌이다니 말이 됩니까?”
나는 그때 이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즉석에서 그 스님 앞에 참회를 드렸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 일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다. 나처럼 잘 잊어버리는 사람이 그때 그 스님 이름과 얼굴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도, 그날 들은 시은에 대한 경책의 말씀이 내 안에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은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시주는 그가 베푸는 시물로 인해 복을 짓게 되지만, 그걸 받아쓰는 쪽에서는 그만큼 시은의 무게를 져야 한다. 세상에 공 것은 어디에도 없다. 모두가 스스로 뿌려 스스로 거둘 뿐이다.
글출처 : 오두막 편지(法頂 스님, 이레) 中에서......
“스님은 강원도 그 산골에서 혼자서 무슨 재미로 사세요?”
난 그때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대꾸했다.
“시냇물 길어다 차 달여 마시는 재미로 살지요.”
무심히 뱉은 말이지만 이 말 속에 내 조촐한 살림살이가 함축되어 있을 것이다.
올 겨울은 눈 고장에도 눈이 별로 내리지 않았다. 그 이름도 생소한 기설제(祈雪祭)까지 재냈다는데도 눈은 내리지 않았다. 이 고장 사람들 말로는 이런 일은 30년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겨울철이면 눈 치우는 일이 고된 일과였는데 올해는 눈 치우는 데 쓰이는 가래가 알 일이 없어, 눈 대신 개울에서 깨 놓은 얼음덩이를 치우는 데 쓰였다.
농사짓는 사람들은 벌써부터 물 걱정이다. 눈 고장에서는 겨우내 쌓인 눈이 땅 속으로 녹아들어 가뭄을 모르는데, 올 겨울은 눈이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농업용수가 달릴 걸 염려해서다. 우리들이 자초한 전 지구적인 기상이변을 이 산중에서도 실감할 수 있다.
그래도 얼음장 밑으로 맑은 물은 흐른다. 깊은 산중이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도 물을 별로 줄지 않는다. 이 물이 아니면 이 산중에서 살지 못할 걸 생각하니, 흐르는 물에 고마움을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보기 드물어졌지만 옛 절의 부엌문에는 용과 호랑이의 그림이나 글씨가 붙어 있었다. 물과 땔감을 공급하고 주재하는 일종의 수호신이다. 흘러가는 물이지만 물을 함부로 쓰면 용이 화를 내고, 산골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땔감이라도 헤프게 쓰면 호랑이가 노한다고 믿었다. 이 땅위에 있는 자연의 소산을 그만큼 신성시하고 아낄 줄 알았던 우릴 동양인의 심성이었다.
우리가 처음 절에 들어왔던 시절만 하더라도 절에서는 시주물건에 대해 타이르는 말이 가장 많았다. 시주의 은혜를 많이 지면 내생에 그 집 소가 되어 힘든 일로 갚아야 한다는 말을 노스님들로부터 수없이 들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저 겁주려고 한 말이 아니라 그 안에는 털끝만큼도 어김이 없는 무서운 인과의 도리가 들어 있다.
새로 세운 절에서 기회가 있을 때만다 ‘가난한 절’을 내세우는 것도, 될 수 있는 한 시은(施恩 - 시주의 은혜)을 적게 지고 살자는 뜻에서다. 수행자에게는 풍요로운 물질과 편리한 시설이 두려워해야 할 함정이기 때문이다. 풋중 시절에 구참 스님들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사중 소임을 보는 스님들 방에는 반드시 상하로 된 등잔이 있었다. 공과 사가 분명해서 사중 일을 볼 때는 사중 등잔을 켜고, 개인 일을 볼 때는 개인 등잔을 켰다. 그런데 등잔의 위치를 사중 등잔은 하단에 놓고 개인 등잔은 상단에 놓은 것이 상례였다. 왜냐하면 기름을 붓다가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사중 등잔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기름 몇 방울 가지고 쩨쩨하게 뭐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어 귓등으로 흘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것으로 등잔뿐 아니라 매사에 공과사가 분명했고, 개인의 사물보다는 공유물을 끔찍하게 여겼던 그 정신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정신으로 조선조의 갖은 박해 속에서도 오랜 세월 절이 유지되어 올 수 있었고 또한 이런 점이 청정한 승가의 정신이기도 했다.
청정한 승가 정신이 결여된 사람들이 운영하는 절은 절 살림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누구누구라고 그 이름을 들출 것도 없이, 절 재산을 개인의 재산처럼 부당하게 소비하고 탕진한 사람들의 말로는 하나같이 비참하다. 인과의 도리가 어김없음을, 시은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우리 눈앞에 보여주고 있다.
40여 년 전 해인사 학인 시절에 내가 몸소 겪은 일이다. 그 무렵에는 산중 절 어디를 막론하고 전기가 들어오기 전이라 큰방, 작은방 할 것 없이 기름등잔을 켰다. 해가 지기 전에 램프의 등피를 닦고 석유를 채우는 것이 해질녘의 일과의 하나였다.
설 무렵에는 일과를 한 사흘 쉬기 때문에 낮에는 대개 산에 오르고 밤에는 네댓씩 뒷방에 모여 윷놀이나 성불도 놀이를 하면서 왁자지껄했다. 내가 거처하는 방에서도 학인들이 와서 윷놀이를 하고 놀았다.
그때 해인사는 청담 스님이 주지인데 종단 일을 겸임하고 있어 현장에 없는 이름뿐이 부재 주지이고 실질적인 절 운영은 총무인 문성 스님이 맡아 했었다. 문성 스님은 성실한 구참 스님으로 그때 고성 옥천사 주지로 있었는데 청담 스님의 간청으로 해인사에 와 계셨다.
어느 날 아침 공양 끝에 나보고 할 말이 있으니 자기 방에 좀 와 달라고 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총무 스님 방으로 갔더니 그만 소임을 내놓고 가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했다.
“스님까지 그럴 줄은 몰랐소. 시주가 이 산중에 기름을 올려 보낼 때는, 그 등불 아래서 부지런히 정진해서 중생을 교화해 달라는 간절한 소원에서일 것이오. 그런데 그 시주의 등불 아래서 윷판을 벌이다니 말이 됩니까?”
나는 그때 이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즉석에서 그 스님 앞에 참회를 드렸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 일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다. 나처럼 잘 잊어버리는 사람이 그때 그 스님 이름과 얼굴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도, 그날 들은 시은에 대한 경책의 말씀이 내 안에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은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시주는 그가 베푸는 시물로 인해 복을 짓게 되지만, 그걸 받아쓰는 쪽에서는 그만큼 시은의 무게를 져야 한다. 세상에 공 것은 어디에도 없다. 모두가 스스로 뿌려 스스로 거둘 뿐이다.
글출처 : 오두막 편지(法頂 스님, 이레)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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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공 것은 없다...
그렇지요 , 공짜는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