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와 함께 자리를 갖이하랴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가 낮게 깔리는 걸 보고 점심 공양 끝에 서둘러 비설거지를 했다. 오두막 둘레에 무성한 가시덤불과 잡목을 작년 가을에 쳐 놓았는데, 지난봄에 단을 묶어 말려 둔 것을 나뭇간으로 옮기는 일이다. 미적미적 미루다가 몇 차례 비를 맞힐 때마다 게으름을 뉘우치곤 했었다.
내 팔과 다리가 수고해 준 덕에 말끔히 일을 마쳤다. 초겨울까지는 땔 만한 분량이다. 땀에 전 옷을 개울가에 나가 빨아서 널고, 물 데워서 목욕도 했다.
내친 김에 얼기설기 대를 엮어 만든 침상을 방 안에 들여 놓았다. 여름철에는 방바닥보다는 침상에서 자는 잠이 쾌적하다. 침상은 폭 70센티미터, 길이 180센티미터, 높이 30센티미터로 내 한 몸을 겨우 받아들일 만한 크기다. 뒤척일 때마다 침상 다리가 흔들거리는 것이 마치 요람처럼 느껴져 기분이 좋다.
일을 마쳤으니 한숨 쉬기로 했다. 내가 살 만큼 살다가 숨이 멎어 굳어지면 이 침상 째로 옮겨다가 화장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아무도 없는 데서, 제발 조용히, 벗어버린 껍데기를 지체 없이 없애주었으면 좋겠다.
잠결에 쏴 하고 앞산에 비 몰아오는 소리를 듣고 일어났다. 이제는 나뭇간에다 땔나무도 들이고 빨랫줄에서 옷도 거두어들였으니,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한동안 가물어 채소밭에 물을 길어다 뿌려주곤 했는데, 비가 내리니 채소들이 좋아하면 생기를 되찾겠다.
자연은 순리대로 움직인다. 사람들이 분수에 넘치는 짓만 하지 않으면, 그 순리를 거스르지만 않는다면 사람이 살아가는 데 소용되는 모든 것을 대준다. 이런 자연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한 선비가 깊은 산 속 골짜기에 사는데, 임금이 불러 소원이 무엇이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무성한 소나무와 맑은 샘이 산중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무성한 소나무와 맑은 샘이 솟아나는 동안 그의 산중생활은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는 말이다. 전해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서늘해진다. 그 선비의 삶 자체가 청청한 소나무와 맑은 샘처럼 여겨진다.
강과 산과 바람과 달은 따로 주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세속적인 욕심을 떠난 맑고 한가로운 사람이면 누구나 그 주인이 될 수 있다. 사물을 볼 수 있는 눈이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가슴이 열린 사람이라면 어디서나 강산과 풍월의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다.
내가 가끔 들르는 한 스님의 방에는 텅 빈 벽에 ‘여수동좌(與誰同坐)’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까만 바탕에 흰 글씨로 음각된 이 편액이 그 방에 들어설 때마다 말없이 반겨주는 듯하다.
“누구와 함께 자리를 같이하랴.”
그 방 주인의 맑은 인품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아 나는 나무판에 새긴 이 편액을 대할 때마다 미소를 머금게 된다.
옛글 하씨어림(何氏語林)에 보면, 사언혜(謝言惠)라는 사람은 함부로 사람을 사귀지 않아 잡스런 손님이 그 집을 드나들지 않았다. 그는 혼자 차나 술잔을 들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방을 드나드는 것은 오로지 맑은 바람뿐이요, 나와 마주 앉아 대작하는 이는 밝은 달뿐이다.”
청풍과 명월로써 벗을 삼았다니 아무나 가까이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이런 사람은 우리가 그를 가까이 하기보다는 그 나름의 삶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청량감을 준다. 무례하게 끈적거리고 추근대는 요즘 같은 세태이기에 그런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웃에게 맑은 바람과 밝은 달 구실을 하고 있다.
‘누구와 함께 자리를 같이하랴’고 써 붙인 방에는 찻잔이 세 개뿐이다. 세 사람을 넘으면 차 마실 분위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산중에서 누구와 함께 자리를 같이하는가 스스로 물어본다. 사람은 나 하나만으로 충분하니까 사람과 자리를 같이할 일은 없다. 맑은 바람과 밝은 달과 흰 구름, 시냇물은 산을 이루고 있는 배경이므로 자리를 같이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살갗으로 느끼고 가슴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처마 끝 모서리에 박새가 세 군데나 집을 지었다. 두 군데서는 새기를 쳐서 이미 떠나갔고, 한 군데서는 아직 알을 품고 있다. 머지않아 이 둥지에서도 새끼를 쳐서 날아갈 것이다.
박새는 그 성미가 까다롭지 않아 아무데서나 알을 품는다. 겨울철에는 먹을 게 없어 모이를 뿌려주지만 여름철에는 숲에 먹이가 풍부해서 따로 먹이를 주지 않아도 된다.
박새는 가끔 오두막의 창구멍을 뚫어 놓는다. 창에 붙어 있는 벌레를 쪼느라고 그러는지 심심해서 그러는지 모르겠다. 일거리를 장만해 주지 말라고 타이르지만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다. 그래도 부잡스런 아이들이 제 엄마를 따라와 창구멍을 마구 뚫어 놓고 가는 것과는 비교될 수 없다.
산토끼가 뒤꼍 다래넝쿨 아래서 산다. 어둠이 내릴 무렵이면 뜰에 나와 어정거리다가 내가 문을 열고 나가면 놀라서 저만치 달아난다. 놀라지 말라고 달래지만 길이 들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빵부스러기나 과일 껍데기를 놓아두면 깨끗이 먹고 간다. 바위 곁에 싸 놓은 토끼 똥을 보면 어린 새끼도 끼여 있다.
그 중 다람쥐는 나하고 많이 친해졌다. 헌식돌에 먹이를 놓아주면 내가 곁에 지켜 서 있는데도 피하지 않고 와서 먹는다. 밖에 나갔다가 빈집에 돌아오면 짹짹거리면서 나를 반겨준다. 기특하다.
누구와 함께 자리를 같이할 것인가. 유유상종, 살아 잇는 것들은 끼리끼리 어울린다. 그러니 자리를 같이하는 그 상대가 그의 한 분신임을 알아야 한다.
당신은 누구와 함께 자리를 같이하는가.
글출처 : 오두막 편지(法頂 스님, 이레) 中에서......
내 팔과 다리가 수고해 준 덕에 말끔히 일을 마쳤다. 초겨울까지는 땔 만한 분량이다. 땀에 전 옷을 개울가에 나가 빨아서 널고, 물 데워서 목욕도 했다.
내친 김에 얼기설기 대를 엮어 만든 침상을 방 안에 들여 놓았다. 여름철에는 방바닥보다는 침상에서 자는 잠이 쾌적하다. 침상은 폭 70센티미터, 길이 180센티미터, 높이 30센티미터로 내 한 몸을 겨우 받아들일 만한 크기다. 뒤척일 때마다 침상 다리가 흔들거리는 것이 마치 요람처럼 느껴져 기분이 좋다.
일을 마쳤으니 한숨 쉬기로 했다. 내가 살 만큼 살다가 숨이 멎어 굳어지면 이 침상 째로 옮겨다가 화장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아무도 없는 데서, 제발 조용히, 벗어버린 껍데기를 지체 없이 없애주었으면 좋겠다.
잠결에 쏴 하고 앞산에 비 몰아오는 소리를 듣고 일어났다. 이제는 나뭇간에다 땔나무도 들이고 빨랫줄에서 옷도 거두어들였으니,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한동안 가물어 채소밭에 물을 길어다 뿌려주곤 했는데, 비가 내리니 채소들이 좋아하면 생기를 되찾겠다.
자연은 순리대로 움직인다. 사람들이 분수에 넘치는 짓만 하지 않으면, 그 순리를 거스르지만 않는다면 사람이 살아가는 데 소용되는 모든 것을 대준다. 이런 자연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한 선비가 깊은 산 속 골짜기에 사는데, 임금이 불러 소원이 무엇이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무성한 소나무와 맑은 샘이 산중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무성한 소나무와 맑은 샘이 솟아나는 동안 그의 산중생활은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는 말이다. 전해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서늘해진다. 그 선비의 삶 자체가 청청한 소나무와 맑은 샘처럼 여겨진다.
강과 산과 바람과 달은 따로 주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세속적인 욕심을 떠난 맑고 한가로운 사람이면 누구나 그 주인이 될 수 있다. 사물을 볼 수 있는 눈이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가슴이 열린 사람이라면 어디서나 강산과 풍월의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다.
내가 가끔 들르는 한 스님의 방에는 텅 빈 벽에 ‘여수동좌(與誰同坐)’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까만 바탕에 흰 글씨로 음각된 이 편액이 그 방에 들어설 때마다 말없이 반겨주는 듯하다.
“누구와 함께 자리를 같이하랴.”
그 방 주인의 맑은 인품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아 나는 나무판에 새긴 이 편액을 대할 때마다 미소를 머금게 된다.
옛글 하씨어림(何氏語林)에 보면, 사언혜(謝言惠)라는 사람은 함부로 사람을 사귀지 않아 잡스런 손님이 그 집을 드나들지 않았다. 그는 혼자 차나 술잔을 들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방을 드나드는 것은 오로지 맑은 바람뿐이요, 나와 마주 앉아 대작하는 이는 밝은 달뿐이다.”
청풍과 명월로써 벗을 삼았다니 아무나 가까이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이런 사람은 우리가 그를 가까이 하기보다는 그 나름의 삶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청량감을 준다. 무례하게 끈적거리고 추근대는 요즘 같은 세태이기에 그런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웃에게 맑은 바람과 밝은 달 구실을 하고 있다.
‘누구와 함께 자리를 같이하랴’고 써 붙인 방에는 찻잔이 세 개뿐이다. 세 사람을 넘으면 차 마실 분위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산중에서 누구와 함께 자리를 같이하는가 스스로 물어본다. 사람은 나 하나만으로 충분하니까 사람과 자리를 같이할 일은 없다. 맑은 바람과 밝은 달과 흰 구름, 시냇물은 산을 이루고 있는 배경이므로 자리를 같이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살갗으로 느끼고 가슴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처마 끝 모서리에 박새가 세 군데나 집을 지었다. 두 군데서는 새기를 쳐서 이미 떠나갔고, 한 군데서는 아직 알을 품고 있다. 머지않아 이 둥지에서도 새끼를 쳐서 날아갈 것이다.
박새는 그 성미가 까다롭지 않아 아무데서나 알을 품는다. 겨울철에는 먹을 게 없어 모이를 뿌려주지만 여름철에는 숲에 먹이가 풍부해서 따로 먹이를 주지 않아도 된다.
박새는 가끔 오두막의 창구멍을 뚫어 놓는다. 창에 붙어 있는 벌레를 쪼느라고 그러는지 심심해서 그러는지 모르겠다. 일거리를 장만해 주지 말라고 타이르지만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다. 그래도 부잡스런 아이들이 제 엄마를 따라와 창구멍을 마구 뚫어 놓고 가는 것과는 비교될 수 없다.
산토끼가 뒤꼍 다래넝쿨 아래서 산다. 어둠이 내릴 무렵이면 뜰에 나와 어정거리다가 내가 문을 열고 나가면 놀라서 저만치 달아난다. 놀라지 말라고 달래지만 길이 들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빵부스러기나 과일 껍데기를 놓아두면 깨끗이 먹고 간다. 바위 곁에 싸 놓은 토끼 똥을 보면 어린 새끼도 끼여 있다.
그 중 다람쥐는 나하고 많이 친해졌다. 헌식돌에 먹이를 놓아주면 내가 곁에 지켜 서 있는데도 피하지 않고 와서 먹는다. 밖에 나갔다가 빈집에 돌아오면 짹짹거리면서 나를 반겨준다. 기특하다.
누구와 함께 자리를 같이할 것인가. 유유상종, 살아 잇는 것들은 끼리끼리 어울린다. 그러니 자리를 같이하는 그 상대가 그의 한 분신임을 알아야 한다.
당신은 누구와 함께 자리를 같이하는가.
글출처 : 오두막 편지(法頂 스님, 이레)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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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나는 누구와 함께 자리를 같이 하는가???????
오늘 잠자리전 묵상 입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