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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 윗마을의 매화

오작교 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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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오두막 편지
    며칠 전 내린 비로, 봄비답지 않게 줄기차게 내린 비로 겨우내 얼어붙었던 골짜기의 얼음이 절반쯤 풀렸다. 다시 살아난 개울물소리와 폭포소리로 밤으로는 잠을 설친다.

   엊그제는 낮에 내리던 비가 밤 동안 눈으로 바뀌어 아침에 문을 열자 온 산이 하얗게 덮여 있었다. 나뭇가지마다 눈꽃이 피어 볼만했다. 말끔히 치워 두었던 난로에 다시 장작불을 지쳐야 했다.

   옛사람들이 건강 비결로, 속옷은 늦게 입고 늦게 벗으라고 한 그 말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늦가을이나 초겨울에 날씨가 좀 춥다고 해서 곧바로 두터운 속옷을 껴입으면 한겨울의 추위를 이겨내는 데에 저항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햇살이 좀 따뜻해졌다고 해서 봄이 온 것은 아니다. 앞을 다투어 봄소식을 전하는 방송이나 신문에 속아 성급하게 봄옷으로 갈아입으면 변덕스런 날씨로 인해 감기에 걸리기 알맞다.

   ‘늦게 입고 늦게 벗으라’는 교훈은 우리 선인들이 몸소 겪으면서 익혀 온 생활의 지혜다. 무엇이든지 남보다 앞서 가야 직성이 풀리는 성급하고 조급한 요즘의 우리에게는, 속옷만이 아니라 삶의 이 구석 저 구석에 느긋한 여유를 가지고 대응하라는 지혜일 수도 있다.

   속도에 쫓기는 현대인들은 일 년에 한두 차례 있을까 말까한 꽃구경을 가더라도 건성으로 돌아보고 이내 후닥닥 돌아 서고 만다. 그야말로 달리는 말 위에서 산천을 구경하는 격이다.

   어느 시구(詩句)처럼 ‘무슨 길 바삐바삐 가는 나그네’인가.

   이곳 두메산골은 봄이 더디다. 남쪽에서는 벌써부터 매화가 피고 산수유가 한창이라는 소식이다. 이곳은 남쪽에서 꽃이 다 지고 나서야 봄이 느리게 올라온다.

   예년 같으면 벌써 꽃구경하러 남쪽에 내려갔을 텐데, 세월이 내 발길을 붙들고 있다. 많은 이웃들이 생계에 위협을 느끼며 걱정근심 속에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같은 땅에서 차마 한가히 꽃구경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전에 꽃구경하던 일을 되새기는 것이다.

   매화가 필 무렵이면 남도의 백운산 자락 광양군 다압면 섬진 윗마을에 가곤 했었다. 남해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옥곡 인터체인지에서 내려 861번 지방도로를 타고 몇 구비를 돌아 북상하면 바른쪽에 섬진강이 흐른다. 군데군데 대술이 있고 청청한 대숲머리에 하얗게 매화가 피어 있는 걸 보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린다.

   왼쪽이 백운산 자락인데 다압면에 접어들면 동네마다 꽃 속에 묻혀 있어 정겨운 마을을 이루고 있다. 둘레에 꽃이 있으면 다 쓰러져 가는 오막살이일지라도 결코 궁핍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곳 매화의 절정은 단연 섬진 윗마을에 있는 ‘청매실농원’ 언저리다. 요즘은 대형버스로도 올라갈 수 있는 길이 닦여 있지만 그전에는 겨우 경운기가 오르내릴 정도의 오솔길이었다.

   골짜기와 언덕에 숯ㄴ 그루의 매화가 핀 걸 보면, 아무리 물기가 없는 딱딱한 사람일지라도 매화에 도취되지 않을 수 없다. 기품 있는 꽃과 그 향기의 감흥을 모른다면 노소를 물을 것 없이 그의 신생은 이미 막을 내린 거나 다름이 없다.

   강 건너 풍경은 꿈결처럼 아름답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북쪽은 지리산 자락 하동과 구례이고, 남쪽은 백운산 자락 광양 땅이다. 다압 쪽에서 강 건너 북쪽을 바라보면 언덕 위 큰 바위 곁에 올망졸망 붙어 있는 집들이 신선이라도 사는 것처럼 사뭇 환상적이다.

   또 화개에서 하동 읍으로 내려가면서 바라보이는 강 건너 다압 쪽 섬진 마을은 매화로 꽃구름 속에 묻힌 무릉도원이다. 이 길목에서는 배꽃이 필 무렵에도 안복(眼福)을 누릴 수 있다.

   강 건너 풍경은 이렇듯 아름답다 그러나 막상 강을 건너 그 지점에 가보면, 찌든 삶의 부스러기들이 여기저기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우리들의 삶에는 이렇듯 허상과 실상이 겹쳐 있다. 사물을 보되 어느 한쪽이나 부분만이 아니라 전체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꿈은 꿈 자체로서 아름다운 것이지 깨고 나면 허망하다. 그것이 꿈인 줄 알면 거기에 더 얽매이지 않게 된다.

   어느 해 봄이던가, 꽃 속에 묻힌 섬진 윗마을을 이리 보고 저리 보면서 터덕터덕 지나가다가, 산자락에 눈에 띄는 외딴 집이 있어 그 오두막에 올라가 보았다. 누가 살다 버리고 갔는지 빈집인데 가재도구들의 여기저기 흩어진 채였다. 언덕에 차나무가 심어져 있고 동백이 몇 그루 꽃을 떨구고 있었는데, 허물어져 가는 벽 한쪽에 서툰 글씨로 이런 낙서가 있었다.

   ‘우리 아빠, 엄마는 돈을 벌어서 빨리 자전거를 사주에요? 약속.’

   ‘약속’ 끝에다가 하트를 그려 놓았었다. 무심히 이 낙서를 읽고 나니 가슴이 찡했다. 자기 친구들이 자전거를 타는 걸 보고 몹시 부러워하면서 아이는 자기 아빠와 엄마한테 자전거를 사달라고 졸랐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가난한 그 집 아빠와 엄마는 이 다음에 돈 벌면 사주마고 달랬던 모양이다.

   자전거를 갖고 싶어 하던 그 집 아이의 소원이 이루어졌는지 아는 궁금하다. 아직도 자전거를 갖지 못했다면 그 집 아이에게 이 봄에 자전거를 사주고 싶다.

글출처 : 오두막 편지(法頂 스님, 이레)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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