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아미타불은 불교도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말이다. 국산영화 배우들을 비롯하여 시대소설(時代小說)을 다루는 문필업자며, 지나가는 먹물 옷을 보면 “중중 까까중……”이라고 아는 체를 하는 골목대장들까지도 익히 알고 있다. 그러니까 ‘국회 제삼별관(國會 第三別館)’ 보다는 범국민적으로 귀에 익은말이다.
그런데 이 나무아미타불이란 말이 본래 의미와는 달리 엉뚱하게 인식되고 있거나 통용되는 것을 볼 때마다 씁쓸한 생각이 없지 않다. 마치 “오, 주여!”와 비슷한 의미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불교신자 안에서조차 적지 않다.
그 말의 본적지에 조회를 해보면 나무(南無)는 산스크리트어(語)의 ‘Namo’ 또는 ‘Namas’에서 한자(漢字)로 음역한 말인데 돌아가 의지(歸依)한다는 뜻. 아미타불(阿彌陀佛)은 ‘Amitāyus, Amitābha’에서 온 말로 무량수불 무량광불(無量壽佛 無量光佛)을 뜻한다. 어떤 경전에 의하면 아미타불은 멀리 십만억(十萬億) 국토를 지나서 있는 서방정토(西方淨土)를 주재하는 부처님으로 되어 있다. 그 세계에 가고 싶은 희망자는 나무아미타불을 지극하게 부르면 그곳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타(佛陀)의 교설(敎說)이 어디까지나 청중의 수준에 따라 말해진 방편설(方便說)임을 고려할 때 정토(淨土)가 반드시 서쪽으로 그 많은 세계를 지나서만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마음이 곧 부처다. 마음이 청정하면 그 자리가 정토다.”
이와 같은 직선적인 교설로 미루어 보면 불교의 초점은 내세(來世)에 있지 않고 분명히 현세(現世)에 있다.
무량수(無量壽), 영원한 생명이라는 이 말은 자비를 상징한 것이며 무한한 광명인 무량광(無量光)은 곧 지혜를 뜻한 말이다. 그 지혜와 자비는 먼 데 있지 않고 우리 인간의 심성(心性)에 갖추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나무아미타불의 진정한 의미는 나 혼자만 극락세계에 가기 위해 부르는 염불이 아니고 우리 안에 있는 지혜와 자비를 끌어내는 일이다. 즉 지혜롭고 자비롭게 살려는 다짐인 것이다.
함께 사는 이 세계가 지금 어디로 어떻게 움직이고 있건 아랑곳없이 초연하려는 종교인이 있다면, 그가 소속한 종교는 현장 밖에서 말라 죽게 될 것이다. 지혜와 자비가 모든 이웃을 위해 청정하게 베풀어지지 않고 나만의 이해관계로 기울어진다면 그것은 무한한 광명도 영원한 생명도 될 수 없다.
이 시대의 불교도들이 나무아미타불을 입으로만 외우고 몸소 행동하지 않을 때 골목 안 꼬마들한테서만이 아니고 수많은 민중으로부터 날아오는 돌팔매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서산대사 휴정 스님은 백처사(白處士)에게 준 염불문에서 “부처가 하근(下根)의 사람을 위해서는 서방 정토가 10만(十惡) 8천(八邪) 리(理)라고 설하였으니 이른바 서방이 여기에서 멀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말했다. 마음이 곧 부처이니 마음을 바로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1968. 9. 27
글출처 : 영혼의 母音(법정스님, 샘터) 中에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