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
도서명 | 영혼의 母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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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대인관계처럼 복잡하고 미묘한 일이 또 있을까. 까딱 잘못하면 남의 입살에 오르내려야 하고, 때로는 이쪽 생각과는 엉뚱하게 다른 오해도 받아야 한다. 그러면서도 이웃에게 자신을 이해시키고자 일상의 우리는 한가롭지 못하다.
이해(理解)란 정말 가능한 걸까.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가 상대방을 이해하노라고 입술에 침을 바른다. 그리고 그러한 순간에서 영원을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 이해가 진실한 것이라면 항상 변하지 않아야 할 텐데 번번이 오해의 구렁으로 떨어져 버린다.
‘나는 당신을 이해합니다’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언론의 자유에 속한다. 남이 나를, 또한 내가 남을 어떻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이해하고 싶을 뿐이지. 그래서 우리는 모두가 타인(他人).
사람은 저마다 자기중심적인 고정관념을 지니고 살게 마련이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사물에 대한 이해도 따지고 보면 그 관념의 신축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의 현상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은 걸 보아도 저마다 자기 나름의 이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나름의 이해’란 곧 오해의 발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의 색맹에 불과한 존재다. 그런데 세상에는 그 색맹이 또 다른 색맹을 향해 이해해 주지 않는다고 안달이다. 연인들은 자기만이 상대방을 속속들이 이해하려는 맹목적인 열기로 하여 오해의 안개 속을 헤매게 된다.
그러고 보면 사랑한다는 것은 이해가 아니라 상상의 날개에 편승한 찬란한 오해다. ‘나는 당신을 죽도록 사랑합니다’라는 말의 정체는 ‘나는 당신을 죽도록 오해합니다’일 것이다.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다. 종단 기관지에 무슨 글을 썼더니 한 사무승이 내 안면신경이 간지럽도록 할레루야를 연발하는 것이었다. 그때 아는 속으로 이렇게 뇌고 있었다.
‘자네 날 오해하고 있군. 자네가 날 어떻게 안단 말인가. 만약 자네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라도 있게 되면, 지금 칭찬하던 바로 그 혀로 나를 또 헐뜯을 텐데, 그만두게 그만둬.’
아니나 다를까, 바로 그다음 호에 실린 글을 보고서는 입에 게거품을 물어가며 죽일 놈 살릴 놈 이빨을 드러냈다. 속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거 보라고. 내가 뭐랬어. 그게 오해라고 하지 않았어. 그건 말짱 오해였다니까.’
누가 나를 치켜세운다고 해서 우쭐댈 것도 없고 헐뜯는다고 해서 화낼 일도 못 된다. 그건 모두가 한쪽만을 보고 성급하게 판단한 오해이기 때문에.
오해란 이해 이전의 상태 아닌가. 문제는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달린 것이다. 실상은 언외(言外)에 있는 것이고 진리는 누가 뭐라 하건 흔들리지 않은 법. 온전한 이해는 그 어떤 관념에서가 아니라 지혜의 눈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 이전에는 모두가 오해일 뿐.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제기랄, 그건 말짱 오해라니까.”
이해(理解)란 정말 가능한 걸까.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가 상대방을 이해하노라고 입술에 침을 바른다. 그리고 그러한 순간에서 영원을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 이해가 진실한 것이라면 항상 변하지 않아야 할 텐데 번번이 오해의 구렁으로 떨어져 버린다.
‘나는 당신을 이해합니다’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언론의 자유에 속한다. 남이 나를, 또한 내가 남을 어떻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이해하고 싶을 뿐이지. 그래서 우리는 모두가 타인(他人).
사람은 저마다 자기중심적인 고정관념을 지니고 살게 마련이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사물에 대한 이해도 따지고 보면 그 관념의 신축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의 현상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은 걸 보아도 저마다 자기 나름의 이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나름의 이해’란 곧 오해의 발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의 색맹에 불과한 존재다. 그런데 세상에는 그 색맹이 또 다른 색맹을 향해 이해해 주지 않는다고 안달이다. 연인들은 자기만이 상대방을 속속들이 이해하려는 맹목적인 열기로 하여 오해의 안개 속을 헤매게 된다.
그러고 보면 사랑한다는 것은 이해가 아니라 상상의 날개에 편승한 찬란한 오해다. ‘나는 당신을 죽도록 사랑합니다’라는 말의 정체는 ‘나는 당신을 죽도록 오해합니다’일 것이다.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다. 종단 기관지에 무슨 글을 썼더니 한 사무승이 내 안면신경이 간지럽도록 할레루야를 연발하는 것이었다. 그때 아는 속으로 이렇게 뇌고 있었다.
‘자네 날 오해하고 있군. 자네가 날 어떻게 안단 말인가. 만약 자네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라도 있게 되면, 지금 칭찬하던 바로 그 혀로 나를 또 헐뜯을 텐데, 그만두게 그만둬.’
아니나 다를까, 바로 그다음 호에 실린 글을 보고서는 입에 게거품을 물어가며 죽일 놈 살릴 놈 이빨을 드러냈다. 속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거 보라고. 내가 뭐랬어. 그게 오해라고 하지 않았어. 그건 말짱 오해였다니까.’
누가 나를 치켜세운다고 해서 우쭐댈 것도 없고 헐뜯는다고 해서 화낼 일도 못 된다. 그건 모두가 한쪽만을 보고 성급하게 판단한 오해이기 때문에.
오해란 이해 이전의 상태 아닌가. 문제는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달린 것이다. 실상은 언외(言外)에 있는 것이고 진리는 누가 뭐라 하건 흔들리지 않은 법. 온전한 이해는 그 어떤 관념에서가 아니라 지혜의 눈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 이전에는 모두가 오해일 뿐.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제기랄, 그건 말짱 오해라니까.”
1972. 1. 30
글출처 : 영혼의 母音(법정스님, 샘터)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