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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의 정자에서

오작교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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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중의 가을은 차가운 개울물이 흐르는 골짜기로부터 물들기 시작한다. 어느새 벼랑 위에도 단풍이 들었다. 저 골짜기와 벼랑 위에 진달래가 핀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가을이 물들고 있다. 철 따라 옷을 갈아입는 산천의 경계를 지켜보면서 인간의 지혜도 자연으로부터 배울 바가 크겠다는 생각을 했다.

   두메산골의 산전(山田)에는 약초인 당귀가 꽃을 피우고 요즘 한참 감자를 캐고 있다. 어디를 가나 일손이 달려서인지, 혹은 경제적인 타산에서인지, 감자를 캐기 전에 제초제를 미리 뿌려 줄기를 말려버린다. 월남전에서 무성한 정글을 황폐하게 만든 그 고엽제, 그때의 피해로 인해 지금까지도 상처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은 그 독한 약을 농경지에 마구 뿌리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화학비료의 남용으로 인해 가뜩이나 산성화되어 가는 이 땅의 농토가 제초제를 함부로 사용하는 데서 오는 피해는 막심할 것 같다. 토양에 필요한 미생물이 사라져 갈 것이고, 또한 농작물 자체에도 그 독성이 침투되어 결과적으로 그런 농작물을 먹는 사람에게까지 피해가 미칠 것이다.

   자연의 질서와 신비를 등지고 우선 눈앞의 이해관계에만 매달린 반자연적인 오늘의 영농방법에는 적지 않은 문제가 있다. 다른 업종에 비해 소득이 낮은 농업에는 이래서 국가적인 관심과 지원이 따르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에는 오두막에서 가장 가까운(가깝다고 해야 5리 남짓 되는 거리) 마을에서 초상이 났는데, 그는 제초제를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했다. 나도 몇 차례 오르내리는 김에 40대의 그를 본 적이 있는데, 술에 취해서 건들거리는 때가 많았다. 동네에서도 인심을 잃은 듯, 초상집인데도 누가 슬퍼하거나 곡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더구나 명절인 추석 전날에 죽었기 때문에 몇 가구 안 되는 그 동네는 명절을 제대로 지낼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살 만큼 살다가 명이 다하면 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그 어떤 명분으로도 좋은 일은 못 된다. 윤회의 업연(業緣) 같은 것을 떠나서라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어울려 살아온 이웃들에게 그만큼 상처를 남기기 때문에 끔찍하고 안 좋은 일이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음으로 양으로 자연의 은혜와 혜택을 입게 마련이다. 산골에 사는 사람들은 산에서 자라나는 나물과 열매 등 임산물의 혜택을 누구보다도 많이 입는다. 그러면서도 눈앞의 이문에만 팔려 자연의 질서와 생명의 신비나 존엄성 같은 데는 너무 무지한 사람들이 많다.

   지난 추석을 전후해서 직접 보고 들은 일이다. 소나무가 많이 있는 곳에서는 초가을의 산들바람이 불어오면 그 아래 송이버섯이 솟아오른다. 솔가리 속에서 소복이 솟아오르는 송이는 그 생태가 신기하다. 버섯 중에서도 향기가 좋아 시장성도 높다. 그렇기 때문에 산골 사람들은 송이 철이 되면 자기네 산이 아닌데도 마음대로 들어가 송이를 따온다. 값이 좋으므로 다른 일손을 쉬고 너나없이 송이 채취에 열을 올린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밤중에도 전지를 켜 들고 산을 샅샅이 뒤지는 일이다. 심지어 새끼손가락보다 작은 버섯까지 마구 따온다. 한 할머니의 바구니를 보면서 더 자란 뒤에 따지 않고 어째서 어린 것을 따느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따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따가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참으로 쓸쓸하고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다. 자연의 품에 안겨 순박하게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 언제부터 이다지도 영악스럽게 됐는가 싶어서였다. 비록 곰팡이로 된 버섯일지라도 살아 있는 생물이라 잠든 시간이 있다. 그 잠든 시간에 불을 켜 들고 앞을 다투어 어린 것들까지 싹쓸이 채취를 하는 것은 같은 생물의 처지에서 볼 때 너무도 영악스럽다.

   일찍이 우리가 농경사회에서 익히고 가꾸어온 후덕하고 순박한 인심이 산업사회로 넘어오면서 크게 바뀌고 있다. 경제 관념이 인간의 윤리까지도 크게 흔들고 있다. 돈 몇 푼에 사람의 목숨을 수단으로 짓밟고 있다. 또 칸칸이 벽으로 단절된 도시의 주거 형태는 개인주의와 이기심을 낳고 있다. 이런 세태 안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투철한 개인의 삶의 질서 없이는 어려울 것이다.

   나는 곰팡이로 된 버섯 같은 것은 체질적으로 안 맞아 즐겨하지 않는 편인데, 지난 추석 무렵 산골의 송이 채취를 보고 버섯에 대해서 더욱 입맛이 떨어졌다.

   볼일로 산에서 내려와 북한강 기슭의 한 정자에서 하루를 잘 쉰 일이 있다. 강폭이 넓은 강변에 이르면 우선 마음이 트여 시원스럽다. 마침 강변 언덕에 정자가 있어 강물을 바라보며 쉬어가기로 했다.

   정자란 사람이 지어놓은 건축물이지만 사람이 늘 거처하는 곳은 아니다. 길을 가던 과객들이 잠시 들러 땀을 들이면서 풍광을 즐기고 때로는 흥이 나면 풍월(風月)을 읊는 곳이다. 그러니 바람과 달이 잠시 쉬었다 가는 그런 집이다. 우리나라 산천에 아직도 여기저기 남이 있는 정자의 위치를 살펴보면, 그 산자락과 그 강변에 그리고 그 언덕 위에 꼭 있어야 할 조촐한 건축물이다. 그 자리에 정자가 한 채 있으므로 해서 그 산천의 경계가 조화를 이루어 풍광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경제 관념 같은 것은 무시한 채 아름다운 산천의 경계와 운치를 사람하고 즐길 줄 알았던 우리 선인들의 삶의 운치가 정자에도 배어 있다.

   잔잔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으면 우리들 마음도 그 강물을 닮아 편안하고 맑아진다. 강심에는 아까부터 백로가 몇 마리 선회하면서 먹이를 찾는지 아니면 심심해서 그저 날고 있는지 아주 한가롭게 보인다. 강 건너 기슭에 낚시꾼이 몇사람 웅크리고 앉아 있는데, 허공을 유유히 나는 백로에 견주면 사람 쪽이 초라하다. 어째서 같은 사람의 눈에 짐승보다 사람이 초라한 모습으로 드러날까. 짐승은 자연을 즐기면서 자연 일부로 섞이는데, 사람은 그 자연에 섞이지 않고 그 안에서 즐길 줄도 모르고 뭔가를 캐가려고만 하기 때문이 아닐까.

   아침 강과 한낮의 강은, 그리고 저녁 무렵의 강은 그 표정이 너무 판이하다. 엷은 안개에 서린 아침 강은 신선하다. 막 세수하고 난 얼굴 같다. 귀밑머리에 아직 물기가 가시지 않는 화장기 없는 그런 얼굴 같다. 한낮의 강은 깊은 잠에 빠져 있다. 꾸벅꾸벅 조는 것도 아니고 흐름도 멈춘 채 자는 것 같다. 강기슭에 떠 있는 고깃배까지도 곤히 곤히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저년 강은, 해 질 녘의 저녁 강은 잠에서 깨어나 생동한다. 낮 동안 멈추었던 흐름도 저녁 바람에 다시 일렁이고, 석양의 햇빛에 반사되어 고기비늘처럼 번쩍거린다. 저녁 강은 신비스럽다. 강 그림자가 강심에 은은히 비치는 것이 마치 수묵화처럼 보인다.

   저녁노을이 비친 강은 성자의 얼굴처럼 지극히 고요하고 신비스럽고 사뭇 명상적이다.

   한말(韓末)의 경허 선사는 이렇게 읊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모두가 꿈속의 일인 것을
저 강을 건너가면
누가 너이고 누가 나인가

누구나 한번은 저 강을 건너야 한다
나 또한 다를 바 없이
곧 바람 멎고 불 꺼지리라
꿈속의 한평생을 탐하고 성내면서
너니 나니 하고 다투기만 하는가

<92. 11>
글출처 : 버리고 떠나기(法頂 스님, 샘터)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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