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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건부로 뭘 해주겠다는 말은 순수하다고 할 수 없다. 누가 조건부로 날 사랑하겠다고 말하면 그 사랑을 믿을 수 있을까? 그 직장에 있으면 사랑하겠다. 그 직위에 있으면 사랑하겠다, 돈을 잘 벌면 사랑하겠다, 명품 백을 사주면 사랑하겠다……. 이런 조건을 내걸어도 그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조건이 많은 사람은 계약이 많은 사람이다. 어떠어떠한 경우에만 어떠어떠한 일을 하겠다는 말은 계약서를 필요로 하는 말이지 사랑의 말이 결코 아니다. 제약이 많은 사람의 사랑이 성공하는 경우는 드물다. 사랑의 언어에는 결코 조건이 붙지 않는다.


       그런데 현실은 정말 그럴까?


       아무런 조건 없이 세상을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돈을 곧잘 벌어오던 사람이 갑자기 망해 돈 한 푼 못 가져오는 경우, 깨어지는 사랑은 흔하고 흔하다. 순수한 사랑에는 조건이 없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순수한 사랑이란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이익을 보거나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기울어진 사랑이 되기 쉽다. 드러내지 않을 뿐 세상의 사랑은 언제나 자신의 저울추에 상대를 매단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상대의 저울에 걸려 있는 나의 저울추를 비중 있게 만들기 위해 애쓴다. 그런 노력을 나무랄 생각은 없다.


       문제는 저울추의 무게를 무겁게 하기 위해 치장하는 헛된 장신구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재력, 학력, 명예 이런 것도 원래의 가치를 넘어 장신구로 사용된다. 


       박사와 양아치 이야기를 써놓은 지인의 글을 읽다가 "박사와 양아치는 길에 널렸다"라고 댓글을 단 적이 있다. 정말 박사가 너무 많다. 그 분야의 전문가를 박사라고 믿던 시대는 지나갔다. 많고 많은 박사 중에 내가 믿는 박사는 스티븐 호킹밖에 없다. 만나본 적도 없는 그를 믿다니 아마도 그 또한 언론이 만들어낸 신화에 물든 탓이겠지만, 그러나 내가 믿는 것은 박사라는 호칭을 가진 그의 업적이 아니다. 내가 믿는 것은 생에 대한 그의 꺾이지 않는 의지이다.


       "고개를 숙여 발을 보지 말고 고개를 들어 별을 보라"고 한 그 아닌가. 그가 마지막 강연에0서 한 "삶이 아무리 힘들어 보일지라도 우리가 할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는 무언가는 항상 있다"는 그 말이 내겐 어떤 논문보다 가치 있게 다가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 말과 달리 그에게 헌신했던 첫 번째 부인 제인은 그와의 결혼 생활을 포기해야 했다. 모든 경우가 그러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실제 상황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리라. 그와 헤어진 뒤 제인은 그를 뒷바라지하며 보낸 고통과 인내의 시간을 "몸이 한계에 다다르면 깃털만 하나 얹어도 허리뼈가 부러진다"라고 표현했다.


       그런 제인이 내겐 스티븐 호킹 못지않은 박사처럼 보인다. 이미 유명인이 되어버린 장애 있는 남편을 돌봐야 했던 그녀의 헌신이 내겐 박사 학위보다 가치 있게 느껴진다. 연인의 병을 알고도 그를 버리지 않고 아무런 조건없이 결혼을 감행한 그녀가 바로 인생의 박사이다. 


       "박사가 무슨 양아치같이 함부로 말을 한다"는 지인의 글에 "박사와 양아치는 길에 널렸다"는 댓글을 쓴 내가 존중하는 박사란 결코 석사 다음 단계에서 취득하는 학위로서의 박사가 아니다. 내가 존중하는 시인이 글 잘 쓰는 시인이 아니듯, 내가 믿는 박사는 인생의 박사이지 학위의 박사가 아니다. 인생의 박사는 조건부가 없다. 인생의 박사는 설령  그것이 악조건이라 해도 스스로 믿고 있는 사실을 믿는 그래로 실천하는 의지를 보여준다. 스스로 최선을 다했다고 믿는 순간 그것으로부터 후회 없이 불러날 수 있는 인생의 박사는 삶의 고수이다. 고수는 결코 조건부 삶에 기대어 생을 허비하지 않는다. 



    글 출처 : 사랑하다는 말은 언제라도 늦지 않다(김재진 산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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