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고은영 낮잠을 자면서 슬픈 내 첫사랑을 만났다 다음 세상에선 우리 슬픈 운명은 되지 말자 너를 만나기 위해 생전 타보지도 않은 오토바이를 타고 물어물어 간 어둑한 네 방에서 너는 슬픈 눈빛으로 내게 말했지 아직도 사랑한다고 내 가슴 어디에 아직도 네가 남아 있었을까 온통 출렁이던 물빛 슬픔이 가득한 네 방 전장의 폐허처럼 내 가슴에 여울지던 연민의 음영 짙은 그림자들 뜬금없이 불쑥 꿈속으로 찾아 와서 애틋한 모습으로 아파하면 어쩌자는 것인지 이미 엇갈려 부식해 간 우리 운명에 까마득히 지난 세월에도 넌 그대로였지 아주 젊고 건장한 그대로였어 시력을 잃은 내 삶의 누추함이 너에게 전해졌던 걸까 왜냐하면, 나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도 어둠에 서 있는 외로움의 극점을 지나 어떤 슬픔의 극치를 알고 있으니까 고스란히 괘던 우리 은밀했던 비무장 지대 그 슬픈 바람 속에 중심을 잃어버렸던 내 아픈 비밀을 헤집으면 넌 벌써 용서로 자리 잡은 지 오래야 그래, 그래 우리 다음 세상에선 슬픈 운명으로 만나지 말자 절대로 슬픈 운명을 내걸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