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신에게서 위대한 진리를 가르쳐 달라고 요구한
어느 위대한 제자에 관한 야기를 다시 야그하고 싶다. 이 가난한 신은
   <친구여, 무척 덥구나. 물 한 잔 마시게 해다오.>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 제자는 그가 만난  첫번 째 집 문을 두드렸는데 한 아름다운
아가씨가 문을 열었다. 그 제자는 그녀와 사랑에 빠졌으며 결혼해서 일
곱  자녀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비가 오기 시작했고 계속해서 내리고 내리고 또 내렸다.
급류는 넘치고 거리는 물에 잠기고 집들은 떠내려 갔다. 제자는 아내를 꼭
잡고 아이들을 어깨에 올려 놓은 채 떠내려 가게되자 소리쳤다.
    <신이여 구해 주소서.>
그러자 신이 말했다.
    <내가 부탁한 그 물 한잔은 어디에 있는가?>

  인간들은 시간의 곁에서 살고 있다.미래를 창조하는 것은 그들이 즐겨하는
도피게임 이었다.
   우리들은 자신들 내부에서의 변화가 시간 속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며 자신들
내부에서의 질서가 조금씩 조금씩 이루어지고 하루 하루 증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은 질서나 평화를 가져오지 않으며그래서 우리들은 점진성에 의해서사고를
멈춰야 한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가 평화스럽게 살 수 있는 내일이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순간적으로 질서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된다.
진짜 위험이 있을 때 시간은 사라져 버린다. 그렇지 않은가?
거기에는 즉각적인 행동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수많은 문제들에 대한 위험성을 보지 못하며 따라서 그것을 극복하기위해
시간을 창조해낸다.시간은 우리 자신들 내부에서 변화를 일으키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말하자면 사기꾼이다.
시간은 인간이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로 구분해 놓는 한 항상 갈등속에 살게 될 것이다.

  시간에 대한 문제를 배울 수 있는가? 우리는 수 천년이 지난 지금도 서로 증오하고
죽이는 것보다 더나은삶의 방식이 있다는 사실을 배우지 못했다.우리가 현재의 상태 ,
즉 괴물스럽고의미없는 상태로 만들어 놓은 이 인생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시간에 대한
문제가 매우 중요한 것이다.(중략)

당신이 모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까닭은 당신이 그 모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며,
따라서 두려워 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죽음은 하나의 말이요,이미지인데 이것이 공포를 유발 시키는
것이다.그러면 당신이 죽음에 대한 이미지 없이 죽음을 바라볼 수 있는가?사고의 샘인 이미지가 존재
하는 한 사고는 항상 공포를 낳아야만 한다.

우리는 삶과 죽음을 분리했으며 바로 이 삶과 죽음 사이의 공간이 공포인 것이다.

우리들이 대부분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 까닭은 우리가 산다는 것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이다.우리는 사는 방법도 모르고 따라서 죽는 방법도 모른다.

갈등없이 생활을 하는 사람, 즉 아름다운사랑과 더불어 생활을 하는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 죽는 것이기 때문이다.만약 당신이 알고 있는  어떤 것,즉 당신의 가족을 포함해서 당신의 추억, 당신이 느껴온 모든 점들에 무관심해 진다면 죽음은 정화이며 다시 젊어지는 과정이다.즉 죽음은 천진성을 가져오며 천진한사람만이 정열적 일것 이지만 죽은 뒤에 일어나는 일들을 믿거나 알아내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죽은 뒤에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을 알아 내려면 당신은 죽어야만 헌다.이말은 농담이 아니다.당신은 죽어야만 한다.즉 육체적으로가 아니라 심리적으로 내적으로 당신이 소중히 여겨온 모든 것들 그리고 당신이 쓰라려하는 모든 것들에 무관심 해지지 않으면 안된다.

죽는것은  완전히 자기 자신이 없는 ,나날의 열망이 없는 그리고 쾌락과 고뇌가 없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죽음은 재생이고 변화이고 그 안에서는 사고가 전혀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데 그 까닭은 사고가 낡은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있을 때에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이 있다.아는 것으로 부터의 자유가 죽음이며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은 살고 있는 것이다.
(시간 - 슬픔 - 죽음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