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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생일은 남녘에 목련이 필 무렵. 그래서 목력이 피었다는 소식이 들리면 그녀는 가슴이 두근거리곤 합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고향을 떠났고, 대도시의 쌀쌀맞은 환경에도 어느 정도 적응을 했습니다.


    여행을 떠나면 시차를 겪는 것처럼 봄날에도 꽃 피는 시차가 있어서 그녀는 언제나 남쪽에 꽃이 필 때,

    그리고 그녀가 사는 서울에 꽃이 필 때 이렇게 두 번의 봄날을 맞이하곤 합니다.

    언니가 보내준 목련꽃 사진을 보면서 그녀는 어김없이 그를 생각합니다.


    이번 생일은 어디에서 누구와 보내고 있을까.


    그가 잘 지내길, 행복하길 마라면서도 "잘 있지 말아요" 하고 이기적인 생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퇴근길, 그녀는 시내에서 영화를 한 편 보고 들어갈 작정이었습니다.

    그런데 횡단볻를 건너던 그녀는 갑자기 얼어붙은 것처럼 횡단보도 위에 멈춰버렸습니다.


    거짓말처럼 그가 목련꽃 피는 따뜻한 남녘땅도 아닌 서울의 번접한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녀를 보았는지 두 분이 휘둥그레진 채 그녀 앞으로 다가왔죠.


    서로 말을 잊은 채 바라보다가, 신호등이 바뀌려고 깜박거리자, 그가 그녀의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습니다. 간신히 신호가 바뀌기 전에 길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사이 그도 서울로 올라와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고 5월에 결혼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가 "결혼식에 오겠느냐?"는 말을 하지 않았서 고마웠고, 지나간 시간들을 다 슬프게 만들어버리지

    않아서 고마웠고, 이렇게 넓은 곳에서 거짓말처럼 다시 만나다니,

    우리가 정말 특별한 인연인 모양이라고 말해줘서 고마웠습니다.


    오늘이 그의 생일이니 아마도 그는 약혼녀와 생일 약속을 했겠지요.

    내색하지 않고 앉아 있는 그를 위해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약속이 있어 가던 중이었다고. 만나서 반가웠다고.


    오늘이 생일이라는 걸 기억하고 있다는 말을 끝끝내 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어쩐지 그에게도, 그의 약혼녀에게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았죠.


    기적 같고 거짓말 같은 일은 어딘가에서 멈추기 마련이라는 걸 알 만큼은 나이를 먹은 그녀.

    마치 배우라도 된 것처럼 그녀가 지을 수 있는 가장 고운 미소를 남기고 그와 헤어졌습니다.


    영화를 보려 했던 그녀에게 영화 같은 일이 일어난 저녁,

    그녀는 영화관으로 가는 대신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걷기로 했습니다.


    영화 <화양연화>에서 차우를 떠나보내고 혼자 남은 리엔이 그녀 인생의 화양연화를 되돌아보듯,

    그와 함께한 순간들을 돌아보았습니다.


    서출고 아쉬운 연애였지만,

    그 만남이 있어서 서로가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그녀는 생각합니다.


    이제 더 이상 목련이 피어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저 꽃이 핀 만큼만 기쁘면 좋겠다.

    그렇게 마음을 꼭꼭 다지며

    한 시절을 건너가듯

    그녀는 봄날의 저녁을 향해 천천히 걸었습니다.


    글 출처 : 저녁에 당신에게(김미라, 책읽은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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