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는 원고의 행위가 무효라고 주장하고, 상표법에서 정한 제3자는 선의의 제3자를 의미하는데, 원고는 악의의 제3자에 해당하므로."

 

   "…원고의 손해배상 청구 부분의 소는 부적법하여 각하하고, 원고의 피고에 대한 청구는 위 인정 범위 내에서 이유 있어 인용하고, 나머지 청구는 모두 기각하기로 한다."

 

   법원 판결문의 일부이다. 법으로 들어가는 최초의 관문에는 어렵고 딱딱한 법률용어가 기다리고 있다. 아는 사람끼리는 통하겠지만 모르는 일반인들  은 주눅 들기 십상이다.

 

   법률용어가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일본강점기의 영향이 크다. 1912년에 만들어진 조선민사령은 일본의 법을 우리나라에 그대로 적용하는 근거가 됐다. 현재까지도 적지 않은 법률용어가 일본의 것과 같거나 비슷하다. 게다가 법조인의 직역(職域) 이기주의도 한몫을 하고 있다고 본다. 지금  은 사섭시험제도 대신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제도가 도입되어 법조인의 되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해졌고, 법조인의 숫자도 훨씬 더 늘었지만 과거 사법시험 합격자 수는 한 해에 수십 명에서 수백 명에 불과했다. 특권층이라 할 수 있는 법조인들에게 법학은 쉬워야 할 필요가 별로 없었던 듯하다.

 

 

   최근 법제처와 대법원 등에서 법률용어를 쉬운 우리말로 바꾸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하고 있다. 늦은 감은 있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최소한의 기본적인 용어는 알아야 한다. 재판에서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일상생활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법률 유사용어 몇 가지를 소개한다.

 

 

법률에서 선의는 '좋은 뜻'이 아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선의(善意)좋은 뜻’ ‘착한 마음으로, 악의(惡意)나쁜 마음’ ‘좋지 않은 뜻이라고 나온다. 하지만 법에서는 선의와 악의를 이러한 도덕적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법률에서 선의란 어떠한 사정(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말이고, 악의란 어떤 사정을 알고 있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구분하는 이유는 선의인가 악의인가에 따라 결과(법률효과)가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사정을 모르는 당사자나 제삼자의 거래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개념이 되기도 한다

 

 

   사례 1 

   

   빚이 많은 A 씨는 자신의 유일한 재산인 집을 지키기 위해 친구인 B 씨에게 집을 판 것처럼 서류를 꾸몄다. A 씨는 집을 다시 되돌려 받는다는 조건으로 임시로 B 씨에게 등기를 넘겨 주었다. 그런데 B 씨가 딴 맘을 먹고 C 씨에게 집을 팔아버렸다. 이때  A씨가 짖을 다시 돌려받을 수 있을까?

 

 

   이때 관건은 C 씨가 선의였느냐, 악의였느냐 하는 것이다. 만일 C 씨가 악의였다면, 즉 A와 B 간의 거짓거래 사실을 알고 집을 샀다면 A 씨는 다시 돌려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C 씨가 선의였다면(A와 B 간의 거짓거래가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A 씨는 집을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다.

 

 

도박 빚은 '무효', 미성냔자 금전거래는 '취소'

 

 

   무효나 취소는 법률행위의 효과를 소멸시킨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런데 무효는 처음부터 효과가 없는 것이고, 취소는 취소권을 행사할 때 비로소 효과가 생긴다는 차이가 있다.

 

   ‘무효란 처음부터 어떠한 법률효과가 전혀 생기지 않는 것을 말한다. 무효인 행위의 예를 들어보자

 

   돈을 받고 유부남의 첩이 되기로 한 계약, 도박 빚을 부동산으로 갚기로 한 약속 등은 사회질서에 어긋난다. 1년에 수백 퍼센트의 이자를 내기로 한 금전거래 등은 불공정한 법률행위이다. 따라서 애초부터 무효이다. 이러한 무효 거래나 계약했다면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도 된다.

 

   ‘취소는 어떤 행위가 일단 유효한 것으로 보되, 취소의 의사표시를 통해 소급하여 효력을 부정하는 것이다. 취소할 수 있는 행위로는 미성년자가 부모 동의 없이 한 행위, 착오·사기·협박에 의한 행위 등이 있다.

 

 

   사례 2 

   

    고등학생 D 군은 등록금을 낼 돈으로 게임기를 샀다.  완구점 주인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D 군에게 게임기를 팔았다. D 군의 부모는 완구점을 찾아가 따졌다. 법적으로 돈을 돌려받을 근거가 있을까?

 

 

 

   이때 D 군의 부모는 완구점 주인에게 취소권을 행사할 수 있다. 민법(5)에 따르면 미성년자가 법정 대리인의 동의를 얻지 않고 한 법률행위는 취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D 군의 부모는 게임기를 돌려주고 돈을 돌려받을 수 있게 되고, D군은 애초에 게임기를 사지 않은 상태가 된다.

 

   하지만 D 군의 부모가 아들에게 게임기를 선물한 셈 치고 그냥 놔둘 수도 있다. D 군의 부모가 취소권을 행사하지 않고 유효한 거래로 인정해주는 것을 추인이라고 한다. 추인을 통해 게임기의 거래는 유효한 거래가 된다. 애초부터 효과가 없느냐(무효), 당사자가 효력이 없다는 의사표시를 할 때까지는 유효한 것으로 보느냐(취소), 이것이 무효와 취소가 다른 점이다.

 

 

흠 있는 소송은 '각하', 패소판결은 '기각'

 

 

   재판을 걸었는데 기각이나 각하됐다는 통지를 받을 때가 있다. 이것은 일단 청구(또는 신청)가 재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기각과 각하는 약간 차이가 있다.

 

   각하는 실체적인 내용을 따지기 전에 소송의 형식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을 때 주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민사소송비용인 인지대를 내지 않거나 보정 명령을 받고서도 정해진 기간 안에 서류를 보완하지 않으면 법원은 소장 각하 명령을 내리게 된다. 또한 기간이 지난 다음에 재심(또는 상소)을 청구하거나 이미 이혼한 사람이 이혼소송을 냈다면 적법하지 않은 소로써 각하를 면치 못한다. 이렇듯 각하는 형식적인 흠결로 재판이 종료되는 경우가 많다.

 

   이와는 달리 기각은 일단 소송의 형식적 요건을 갖추었으나, 내용을 따져보니 원고가 청구하는 내용이 옳지 않다는 뜻이다. 예컨대 돈을 빌려준 것이 아니라 그냥 주기로 했으면서 대여금 소송을 내거나, 다친 데가 없으면서 보험회사를 상대로 상해보험금을 청구한 사람은 법원에서 기각 판결을 받게 된다.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라는 말은 원고 패소판결을 의미한다. 참고로 승소 판결은 원고의 청구를 인용한다라는 표현을 쓴다. 한편 1(2)에서 패소한 사람이 항소(상고)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을 항소(상고)기각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항소기각 = 항소인 패소가 된다.

 

   정리하자면, 일단 소송으로서 요건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소송은 각하를 당하고, 요건을 갖추었으나 청구 내용이 정당하지 않으면 기각당한다고 할 수 있다(그런데 형사사건에서는 형식적 흠결에 대해서도 기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벌금, 범칙금, 과료, 과태료 차이는?

 

 

   벌금, 범칙금, 과료, 과태료 모두 금전을 내게 하는 방식으로 공적 의무 위반자에게 제재를 과하는 제도이다. 하지만 세부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각기 다소 차이가 있다.

 

   벌금은 사형, 징역형 등과 함께 대표적인 형벌의 하나다. 벌금형은 재산형으로, 전과의 일종이다.

 

   범칙금은 형사절차에 앞서 사건을 신속, 간단하게 처리하기 위해 경찰서장 등이 위반자에게 일정액을 내게 하는 돈이다. 예를 들어 노상 방뇨, 암표 거래 등 경범죄와 단순한 교통 신호위반 등은 범칙금 대상이다. 속된 말로 경찰이 딱지를 끊는경우다. 범칙금 미납 때 즉결심판에 넘겨져 벌금이 부과되는 일도 있으니 유의하자.

 

   과료는 벌금과 마찬가지로 재산형의 일종이다. 벌금과 다른 점은 액수이다. 벌금의 부과액이 5만 원 이상인 것과 달리, 과료는 2,000~5만 원이다. 형사재판에서 벌금형이나 과료형에 불복하려면 항소(또는 상고)를 제기할 수 있다.

 

   과태료는 국가 또는 공공단체가 과하는 금전적인 제재이다. 형벌은 아니고 일종의 행정처분이다. 예를 들어 금연 구역 흡연 시, 주정차 위반 시, 과속카메라 적발 시 부과되는 것이 과태료다. 행정처분인 과태료 처분에는 법원에 재판을 신청, 불복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