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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 있는 동안 행복하다 / 사랑한다는 말은 언제라도 늦지 않다

오작교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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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기 고양이가 나타났다. 문 앞에 있는 새로운 생면. 길 위에 녀석을 세워놓고, “뭘 주지?” 혼잣말을 하며 재빨리 집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냉장고를 뒤져도 아무것도 없다. 혼자 사는 작업실에 먹을 것이 남아 있을 리 없다.

   다시 바깥으로 나오자, 나비를 잡으려고 그러는 건지 공처럼 뛰어오른 어미 고양이가 허공으로 솟았다가 착지한다. 놀라운 탄력성이다. 묘기를 부리는 서커스의 달인 같기도 하고, 요가의 달인만이 할 수 있는 아사나를 보여주는 것 같다고 하다. 저 고양이를 이제 요기라고 불러야지. 그런데 요가엔 정말 고양이 자세가 있다. ‘비달라 아사나’라고 부르는 고양이 자세는 네발을 바닥에 딛고 척추는 편 채 먼 하늘을 바라보는 고양이처럼 고개를 들어 목을 쭉 늘이거나, 기지개 켜듯 두 팔을 앞으로 쭉 뻗고 엉덩이를 뒤로 빼는 자세이다. 따라 해보고 싶지만, 고양이처럼 튈 수 없는 나는 그저 경이로운 눈길로 녀석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사진을 찍고 싶어 다가가자, 허리를 동그랗게 말며 착지한 녀석이 재빨리 숲 쪽으로 가버린다. 어미를 따라 사라지는 아기 고양이를 보며 나는 갑자기 무중력상태의 우주 공간을 떠올린다. 녀석들은 아무래도 다른 별의 식구 같다.

   봄밤, 아름다운 집들을 보며 산책한다. 작업실로 쓰기 위해 값싸면서도 멋진 공간을 찾고 또 찾다가 값은 싸고 공간을 멋있어야 한다는 이율배반적인 소망을 포기할 무렵 우연히 괜찮은 집을 발견했다. 이곳에서 글 쓰고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결심은 그러나 오래가지 않아 균열이 생기고 말았다. 고적함이 밀려온 것이다. 고적함과 함께 찾아온 것은 뜻대로 되지 않는 건강에 대한 좌절감이었다.

   그런 좌절감을 넘어서기 위해 택한 것이 산책이다.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라는 말도 있으니 걸어보자. 걷고 또 걷자. 마을은 걷기게 좋은 환경이었다. 박공지붕들을 바라보면 걷다 보면 언덕이 나왔고, 공원이 나왔다. 도서관도 멀지 않고 조금만 더 걸어가면 둘레길이 아름다운 산도 있다 이대로 계속 가면 지구라는 둥근 별의 끝까지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구라는 이 별에 학습하기 위해 왔으며, 무엇을 얼마나 배울 수 있느냐에 따라 다음 차원으로 진화한다. 잿빛 겨울을 지나 봄은 진화하기 좋은 계절이다. 그러나 겨울이 가고 봄이 시작된다지만 사실은 시작도 끝도 없다. 둥근 지구를 돌고 돌아도 끝이 없듯 시작이 끝이고, 끝이 시작인 것이다. 그런데 누가 계절에다 어디서 어디까지가 겨울이며, 어디서 어디까지가 봄이라고 이름을 붙여놓았는가?

   무시무종(無始無終, 불교에서 시간과 공간이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음)의 세상이지만 끝과 시작 사이에 끼어 있는 틈은 있다. 틈새에 낀 채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끼어 있다. 만족과 불만족 사이에 끼어 있고, 무지와 해탈 사이에 끼어 있으며, 슬픔과 기쁨 사이에 끼어 있다. 잘난 척하지만, 우리는 틈새에 끼어 연명하거나 하루하루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 위해 비겁하지만, 품위 있는 척 세상 속으로 나간다. 끝과 시작 사이에 끼어 있는 그것을 나는 그리움이라 부른다. 기다림이라고 바꾸어 불러도 무방하다. 삭막한 세상과 세상의 틈에서 마치 시멘트 바닥 틈새를 뚫고 피어나는 제비꽃처럼 그리움 때문에 우리는 꽃을 피운다.

   기다림마저 내려놓을 나이가 되었건만 그래도 나는 기다린다. 돌이켜보면 기다림엔 나이가 없다. 그리움 또한 나이가 없다. 향기 나는 봄밤, 아름다운 집들을 보며 걸으면서도 나는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기다림이 아름답다는 건 돌아올 상대가 있을 경우에 그렇다는 것이다. 기다림은 때로 무의미하다. 미래에 대한 기대에 매여 살다 보면 지금, 이 순간을 잃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 수 있는 시간은 오직 지금, 이 순간뿐이다. 지금, 이 순간만이 현실이다. 기다림 또한 미래의 일인 것 같지만 미래는 언제나 현재가 만들어내는 시간이다. 한 발 한 발 앞으로 걸어 나가며 발바닥이 땅에 닿는 그 순간만이 지금 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현실이다. 우리는 언제나 현재만을 살 수 있다. 그렇게 걸으면서도 쓴 시도 있다. 걸으면서 어찌 시를 쓸 수 있나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시상(詩想)이 가장 잘 떠오를 때가 바로 걷는 순간이다. 어쩌면 쓰기 위해 걷는 것인지도 모른다. 걷는 동안 떠오른 시구를 적기 위해 예전엔 길모퉁이에 주저앉아 수첩 같은 것을 꺼내 쓰곤 했다.

   시상이 이어지면 길에 앉아 시 한 편을 다 쓴 적도 있다. 마치 누군가가 불러주고 받아 적듯 길 위에 앉아 쓴 시 중 하나가 바로 <길 위에 있는 동안 행복하다>이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많은 사람이 자신의 블로그에 퍼다 놓은 이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둥근 우주같이 파꽃이 피고
살구나무 열매가 머리 위에 매달릴 때
가진 것 하나 없어도 나는
걸을 수 있는 동안 행복하다. 
길 위에 있는 동안 행복하다 詩 전문 보기

   시를 쓴 곳은 경의선 철길이 달리는 백마역과 풍산역 사이의 자전거도로였다. 25년 넘게 그곳에 살았던 내겐 추억이 많은 곳이다. 지금은 오래된 살구나무와 벚나무들로 제법 울창해졌지만, 그 시절 보조 바퀴가 달린 자전거를 타고 소리를 지르며 달리던 아이들 모습은 시에서 ‘가진 것 하나 없어도 나는 걸을 수 있는 동안 행복하다“라는 구절을 낳았다.

   그 시절 실직 상태로 몸과 마음이 몹시 힘들던 때였지만, 한편으로 살구나무 열매 매달리는 길을 원 없이 걸었을 만큼 시간이 많은 때이기도 했다. 인생에 대해 수없이 고뇌하던 그 시절 나는 삶에 대해, 그리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디는 방법에 대해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인지 모른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사건 그 자체보다 그것에 저항하는 내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일어난 사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강하게 밀쳐내려는 저항이 나를 더 고통 속으로 빠뜨린다는 사실을 길 위에서 알아차린 것이다.

   고통스러운 현실의 구성 요소는 고통을 주는 상황과 그 상황이 싫다고 느끼는 나의 저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주친 상황은 바꿀 수 없다고 해도 나의 저항은 생각을 바꿈으로써 줄일 수 있다. 생각을 바꾼다는 말은 고통에 대한 해석을 바꾼다는 뜻이다. 고통의 물리적 크기를 줄일 수는 없어도 ’고통은 나를 성장시키기 위한 시련이다‘라는 식으로 고통의 의미에 대해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그것은 새로운 기회로 바뀔 수도 있다. 인생은 단 한 번뿐이며 우리는 고통보다 기쁨을 누려야 한다. 기뻐하기에도 인생은 길지 않은 것이다. 찔레꽃이 피고 있던 길모퉁이에 주저앉아 시의 마지막을 나는 이렇게 썼다.

아무것도 찌르지 못할 가시 하나 내보이며
찔레가 어느새 울타리를 넘어가고
울타리 밖은 곧 여름
마음의 경계 울타리 넘듯 넘어가며
걷고 있는 다리는
길 위에 있는 동안 행복하다.
글출처 : 사랑한다는 말은 언제라도 늦지 않다(김재진, 산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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