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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없는 길 / 사랑은 사랑으로 돌아옵니다

오작교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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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이면 떠오르는 스님이 있습니다. 그 스님 덕에 처음으로 귀뚜라미를 관찰하게 되었지요. 귀뚜라미가 그렇게 잘 생겼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그 자체로서 독립된 생명체 같던 더듬이와 멋지게 꺾어진 다리, 뒷다리 끝이 마치 새의 발가락처럼 세 갈래로 갈라져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알고 보니 귀뚜라미야말로 늘씬한 롱다리를 가진 멋쟁이였습니다.

   방 안에 들어온 귀뚜라미를 내보내려고 가벼운 소동을 일으키던 우리에게 스님은 내보내려고 애쓰지만 말고 한번 자세히 관찰해보는 게 어떠냐고 말했습니다.

   “귀뚜라미가 성가시다고 생각하는 것도 마음에 달렸지. 귀뚜라미는 저 스스로 바깥에 있다고 여길 것 같아, 안에 있다고 여길 것 같아? 안이니 밖이니 하는 것도 다 분별이지. 귀뚜라미는 안이니 밖이니 하는 생각이 없어. 내보내도 그건 인간의 마음이 그럴 뿐 그저 그 자리에 있는 거야. 다들 머릴 깎았어도 귀뚜라미보다 못하니, 원.”

   없을 무(無) 자에 인연 연(緣) 자였던가? 무연이란 법명을 썼던 그 스님은 기인이라면 기인이었고, 좋아하는 몇몇 사람들의 입에만 오르내리는 분이었습니다. “오래 머물면 정이 붙는다. 오래 머물면 게으름이 깃든다”라던 평소 말씀 그대로 그는 한곳에 붙박여 있지 않는 운수(雲水)였지요.

   그 스님을 볼 때마다 나는 한 그루 고목을 떠올렸습니다. 비구니 스님이지만 여성스럽지 않고 강건했던 그는 언제나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눈이 오거나 비가 오거나 상관없이 산에서 잘 준비하고 있던 스님의 바랑 속은 한마디로 만물상이었습니다.

   정진하는 시간 외에 채마밭을 가꾸거나 약재로 쓸 산야초와 야생화를 찾아 산을 헤매고 다니던 스님은 특이한 등산가였고, 남다른 식견을 가진 약초 전문가이기도 했습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산행 역시 무연스님을 따라간 산행이었지요.

   스무 시간 가까이 내설악과 외설악 일대를 오르내리고도 지칠 줄 모르는 스님을 쫓아가느라 우린 꼭 특수훈련을 받는 기분이었습니다. 길도 아닌 곳을 헤치고 다니는가 하면, 계곡 쪽으로 걷다가 난데없이 낭떠러지 밑으로 밧줄을 타고 내려가기도 하면서 종횡무진 산을 가로지르다 보니 겁이 나기도 했고 힘도 빠져 그 당시엔 그만 산행을 포기하고 내려가고 싶었습니다.

   밧줄 때문에 손바닥에 상처가 생겨 돌아가자고 하자 “정말 아픈 것은 손바닥이 아니라 손바닥에 빼앗겨버린 네 마음이지. 아픈 것을 참고 견딜 수 있는 마음을 키우지 못하면 도는커녕 사바세계에서 살아가기도 힘들아. 가고 싶으면 너 혼자 돌아가거라”하고 스님은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방향을 알 수 없는 산중에서 혼자 갈 수도 없었거니와 길 아닌 길로만 왔기에 돌아가려 해도 돌아갈 수 없는 형편이었지요. 할 수 없이 “그럼 이제 좀 길 같은 길로 가요. 스님” 했더니 “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야, 네가 밟는 곳이 다 길이지” 하고 대꾸하시더군요. 나야 등산화라도 신고 있었지만 고무신을 신고도 날아갈 듯 앞장서는 스님 앞에서 나는 더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 나를 한동안 지켜보던 스님은 바랑을 뒤져 뭔가를 꺼내더니 상처 난 손에 발라주었습니다. 직접 만든 약이라는 그것은 골풀이라는 이름을 가진 야생초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유격대원 같은 그 산 타는 솜씨도 놀라웠지만, 더욱 놀라웠던 건 산에서 자라는 나무와 야생화, 산야초에 대한 스님의 해박한 지식이었습니다.

   다시 산을 타는 도중에 함께 갔던 도반이 벌에 쏘여 금방 눈언저리가 부어올랐습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나는 깜짝 놀라며 “무연스님. 큰일 났어요!” 하고 소리쳤지요. 그러나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스님은 전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등산용 버너를 꺼내고, 씨앗 알갱이 같은 그것들을 한주먹 넣어 물을 끓이기 시작했습니다.

   물이 다 끓자 달인 물은 마시게 하고, 익힌 씨앗을 잘게 씹어 부어오른 부위에 발랐습니다. 그러나 도반의 상태가 너무 심해 내가 “빨리 하산해 병원에 가야 하는 것 아닐까요?” 하고 걱정하자 스님은 여전히 “병원은 산 아래 있지 않고 마음 안에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 하시며 여유를 보일 뿐이었습니다.

   “부처님이 사시던 당시 더운 나라인 그곳에는 수많은 맹독성 벌레들이 있었다. 병원까지 가는 것보다는 마음의 병원에 의지하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다. 인스턴트 문화가 자리 잡은 서양에서 고통도 진통제나 환각제를 사용해 빨리 벗어나는 것을 좋아하지만, 뭔가를 참는 성품 하나만 길러도 이생에서의 우리 삶은 성공일 거야. 마음을 진정시키면 몸도 따라 차분해진다.”

   스님이 시키는 대로 도반과 나는 숨을 천천히 들이쉬고 내쉬었습니다. 도반은 걱정하던 마음이 사라지자 통증이 훨씬 줄었다고 하더군요.

   그 비슷한 경우를 영화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독이 퍼져 몸이 마비되기 시작한 여인이 ‘이제 내일 아침을 맞이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몸속에 있는 독을 향해 말을 건네던 그 장면은 실제로 일어난 일을 영화로 만든 거였지요.

   “제발 더 이상 다른 곳으로 퍼져나가지 마라. 네가 원한다면 그 속에서 살아도 좋아. 하지만 더 이상 퍼져나가 내 생명을 빼앗지는 마라. 나도 너를 몰아내거나 방해하지 않을게. 우리 서로를 괴롭히지 말고 잘 지냈으면 좋겠다.”

   모든 걸 그저 일어나는 대로 받아들이겠다는 생각을 한 여인은 독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다 그대로 잠이 들었는데, 다음 날 아침에 창문 사이로 비쳐오는 햇살을 보고 자신이 살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후 여인은 모든 걸 버리고 인도로 떠나고, 거기서 스승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되지요.

   산야초를 채취할 때마다 무연스님은 작은 소리로 풀들에게 “고맙다. 고맙다” 하며 인사를 하시더군요. 스님이 산야초와 야생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열 살 되던 해부터라고 합니다.

  

  “6·25 때 피난을 갔는데 거기서 아기를 낳고 출혈이 멈추지 않아 다 죽게 된 여자를 보게 되었어. 그때 노스님 한 분이 무슨 풀을 가지고 치료를 하니까 며칠 만에 그 여인이 살아났지. 그때 나는 들에 피어 있는 풀을 먹고 사람이 살아나는 것이 너무 신기해 관심을 두기 시작했어. 풀과 나무에겐 배울 것이 너무 많아. 뿌리부터 줄기, 잎사귀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는 그들의 삶이 내게 많은 감동을 주었지. 독성이 있는 풀을 실험하다가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지만.”

   어혈이나 중풍에 쓰는 하눌타리, 동상이나 화상에 쓰는 바위취, 신장염에 좋은 자리공, 지혈에 사용되는 부처손 등 모두 무연스님에게 들은 기억이 나는 이름입니다.

   “오래 머물면 정이 붙는다. 오래 머물면 게으름이 깃든다”하고 하던 자신의 말을 지키기 위해선지 어느 날 무연스님은 홀연 세상을 떠났습니다. “길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네가 밟는 곳이 다 길이지” 하던 말대로 스님은 앞장서서 길 없는 길을 가시고 싶었나 봅니다.

   한때 바깥으로 몰아내려고 애쓰던 귀뚜라미를 관찰하며 이 가을, 그렇게 무연스님 생각을 해봅니다. 어디가 안인지 어디가 바깥인지 구별할 수 없는 세월이 물처럼 흐른 뒤 스님과 함께 촛불 밝혀 들고 걷던 밤 산을 다시 타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불길처럼 단풍이 활활 타오르는 날이면 외설악에서 내설악까지 스님 생각을 하며 한번 걸어보고 싶습니다.

글출처 : 사랑은 사랑으로 돌아옵니다(정목스님, 감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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