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점(1967년) / 이만희 감독, 신성일, 문희, 최봉
감독(Director) : 이만희(Lee Man-Hee)
출연 : 신성일,문희,최봉,이향,이용,이해용,옥상미,조덕성,지귀남,나애심,박민재,박기택,송재호,임해림
줄거리 :
조직에 속한 산업스파이로 활동하는 석구(신성일)는 어느 회사에 잠입하여 서류를 훔치다 본의 아니게 사람을 죽이고 양심의 가책을 느낀 나머지, 조직으로부터 탈퇴하기로 한다. 하지만 이를 용납할 수 없는 조직의 이사장(이향)과 최상무(최봉) 등은 그를 제거하기 위해 그에게 도피를 요구하고, 감시의 목적으로 창녀 선(문희)을 붙인다. 덕수궁 근교를 서성이며 몸을 파는 선은 3일간만 석구와 신혼부부로 행세한 채 여행을 떠나면 밑바닥 생활을 벗어날 대가를 받는다는 조직의 제안을 받고 석구와 동행한다.
여행 첫 날, 조직의 음모를 모른 채 조직의 지시로 설악산에 마지못해 여행을 온 석구는 처음에 선을 어색하게 대하고 다른 부부 여행객들도 이를 이상하게 여긴다. 여행 2일째, 선이 창녀라는 소문이 나돌면서 두 사람은 그들로부터 싸늘한 시선을 받는다. 그러나 설악산을 오르내리며 석구와 동행하는 가운데 선은 그의 순수함과 건실함에 매혹되어 사랑에 빠진다. 조직에 대한 환멸과 죽음의 예감을 시시각각 느끼는 석구 또한 선에게 마음을 열어간다. 하지만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범죄소설가로 신분을 위장하고 이 여행에 동행한 킬러(이해룡)에게 감시를 당하고 마침내 여행 3일째, 석구를 처치하기 위해 최상무 일행이 설악산에 도착한다.
계곡과 암벽, 절벽에 놓인 계단을 넘나드는 긴 추격전 끝에 석구는 간신히 최상무 일행을 제거하지만 킬러의 총탄에 맞아 숨을 거둔다. 총소리를 들은 여행자들이 달려와 석구의 신원을 물어보지만 그녀는 어느 것 하나 알지 못한다. 서울로 돌아온 그녀는 다시 덕수궁 근교로 돌아와 호객행위를 한다.
영화보기 : https://youtu.be/KkiEnJ6twJo?list=PL28d5JImIlH4SFDOub4RArDlGy86aKNE5
시놉시스(Synopsis)
한 남자(신성일)가 건물의 지붕을 서성이다 창문을 통해 건물 안으로 들어온다. 고요하게 텅 빈 건물 안에서 남자는 금고를 찾아 그 속의 서류를 꺼내어 살핀다. 그때 총을 든 또 다른 남자가 계단을 올라 그가 있는 곳으로 오고 있다. 둘은 결국 마주치고 비밀 서류가 든 가방을 차지하기 위한 추격과 결투가 시작된다. 추격과 결투의 장소는 계단이다. 그들은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고 붙잡히고 뒤엉키며 싸운다. 마침내 남자가 계단의 끝에서 문을 열지만, 불행히도 셔터가 내려져 있고, 쓰러져있던 또 다른 남자가 다시 그의 발목을 잡는다. 문과 셔터 사이, 그 비좁은 공간에서 둘의 질긴 몸싸움이 이어지고, 먼저 밖으로 나오는 데 성공한 남자(신성일)가 셔터를 내려 상대의 목을 짓누른다. 그의 목 아래에는 비밀 서류가 담긴 가방이 있고 그의 숨은 이내 끊어진다. 그런데 적을 제거한 남자는 의아하게도 가방을 그대로 둔 채 현장을 떠나버린다. 비로소 영화의 타이틀이 셔터 위로 뜬다. 영화가 시작한 지 13분이 지나가고 있다.
어딘지 기하학적으로 왜곡된 것처럼 보이는 공간, 인물들을 포착하는 카메라의 이상한 앵글, 대사 없이 진행되는 인물들의 집요한 행로, 화려한 액션이기보다는 피로하고 무거운 노동으로 느껴지는 대결의 공기, 대결이 벌어지는 계단 장면의 끈질긴 하강의 리듬, 그리고 목적의 완수를 눈앞에 두고 목표물을 버려버리는 남자의 선택. 처음 이 영화를 마주한 날, 나는 첫 시퀀스를 경험한 후, 마치 한 편의 영화 전체를 보고 난 것처럼 얼이 빠졌다. 서사와 관련된 어떠한 정보나 대사가 부재한 상태에서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텅 빈 공간에 던져진 육체적 충돌과 동선만으로 이토록 괴이한 정념을 자아내는 영화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원점>의 첫 시퀀스는 그렇게 느리게 휘몰아쳤다.
그 시퀀스를 보고 나니, 이후의 전개가 어떠하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시퀀스가 도입부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어 보이는 거리의 여자에게로 이행하고, 거기 도시의 밤공기가 한없이 쓸쓸하고 퇴폐적으로 젖어들며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세계를 이룰 때, 나는 이 영화가 과감하게 뚫고 나아갈 미지의 길들에 이미 홀린 상태였던 것 같다. 역시 그러했다. 쇠락한 어두운 건물에서 시작했던 영화는, 도시의 밤거리를 지나 놀랍게도 설악산의 겨울 산장으로 이동한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산업 스파이와 그를 죽이려는 자들에게 고용된 창녀가 가짜 부부행세를 하며 자연 속에서 중산층 부르주아 부부들 사이에 있다. 그곳은 도시와 대비되는 평화로운 자연이 아니라, 도시의 억압된 것들이 뒤틀려 요란하게 아우성치는 시공간처럼 보인다. 위태롭고 불길하면서도 향락적이다. 사람들 사이의 의심과 비밀과 위선, 여기 노골적으로 일렁이는 천박하고 성적인 공기, 설산의 위용과 절벽의 아찔함이 뒤섞이는 가운데, 불균질한 욕망과 죽음의 그림자가 서로 각축을 벌이며 기묘하게 생동하는 것이다.
그 세계의 끝에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사실이라고는 삶의 벼랑 끝에서 남자와 여자가 사랑에 빠진다는 것, 그 사랑이 비극으로 끝나리라는 점 정도다. 실제로 그러했다. 그런데 그 사실의 통속성을 압도하고도 남을만한 장면이 설악산에서의 마지막 시간에 등장한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설산을 가로지르며 도망치고 있는 중이다. 그때, 그들 앞에 산 위로 연결되는 가파른 계단이 나타나는데, 계단의 위와 아래 양쪽에는 남자를 노리는 사내들이 이미 서 있다. 피할 곳이 없다는 사실을 직감한 남자는 바지 벨트를 풀러 계단 손잡이에 걸고 손에 낀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벌이는 탐색과 벨트를 의지한 미끄러짐과 도약, 그리고 지쳐버린 맨몸만으로 성립된 마지막 액션 장면의 호흡은 건물에서의 첫 시퀀스를 떠오르게 한다. 계단에서 상대의 공격을 맨몸으로 질기게 견디는 남자의 시간을 카메라가 함께 버티고 있다는 인상이 반복되면서도 지독한 무력감의 공기를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계단이라는 수직적 세계의 특성상 카메라는 남자의 싸움을 수평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거나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다. 카메라가 남자의 싸움에 수평적으로 가까이 닿을 수 없다는 사실, 그러니까 이 싸움의 치열한 현재성은 남자 혼자만의 것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 결국 이 수직의 풍경에는 어쩔 수 없이 추락에 대한 무기력한 관망이 예견되어 있다는 사실이 (싸움의 승패와 상관없이) 이상하게도 서글픔을 안기는 것이다.
그 수직의 풍경 안에서 남자는 자신에게 돌진하는 육체들로부터 끝내 버텼으나, 어이없게도 저 멀리 아래에서 누군가가 쏜 총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영화는 다시 도시의 밤으로 돌아온다. 남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가 자신을 싫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다고 읊조리던 여자는 도입부에서 본 그 황폐한 어둠의 거리를 다시 서성인다. 설악산에서의 죽음이라는 극적인 사건을 통과했으나 도시의 그 무엇도 변한 것이 없다. 그저 한 남자가 공허하게 세계에서 사라졌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우리가 본 저 많은 사연과 미련들, 저 대담하고 절박한 동선과 충돌, 불쑥불쑥 고개를 들던 생의 감각은 대체 무엇이었단 말인가. 원점. 이토록 뼈저린 영화의 제목을 나는 알지 못한다.
글출처 :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