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이 땅의 주인인가
도서명 | 텅 빈 충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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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앓이를 치르면서 밥해먹기가 귀찮아 며칠 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왔다. 한동안 방송이고 신문이고 듣지 않고 보지 않으니, 마음이 그렇게 맑고 투명하고 편안할 수가 없었다.
요 몇 해 동안 우리는 허구한 날 똑같이 소리 높이 외치고 점거농성하고 짓부수며 불태우고, 걷어차며 두들기고 쏘아대면 잡아 가두는 소식만을 지겹도록 접해왔다. 이토록 흉흉하고 살벌한 장면만을 보고 들으면서 이 땅의 암울한 공기를 마셔온 우리들이다. 모처럼 산하대지에 번지고 있는 싱그러운 봄의 신록과 생업에 열심히 종사하고 있는 건강하고 선량한 우리 이웃들을 가까이서 대하니, 생의 활기 같은 것이 내 안에서도 움트는 것 같았다.
우리 시대를 지탱하며 만들어가는 사람들은 과연 누구일까 하고 근래에 곰곰 생각하게 된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 등을 주무르는 사람들이 이 나라와 우리 시대를 이끌어가는 주역들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그들은 겉으로 드러난 한낱 파도와 같은 존재일 뿐. 파도는 바람이 불어야 일렁거리지, 그 자체로서는 옴짝할 수 없다. 파도의 밑바탕은 끝없이 괴어 있는 바다와 도도히 흐르는 강물이다. 파도는 바람을 타고 바다에서 일어났다가 바람이 자면 다시 바닷물로 잦아든다.
인류역사상 한때의 바람을 타고 솟아났다가 소멸해 버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그 정권들 또한 이 파도와 같은 것들이다. 파도는 기상 상태에 의해 일렁거리다가 잦자들지만, 바다는 시작도 끝도 없이 늘 그 자리에 서 있다. 삶 그 자체에 충실한 기층민들이야말로 우리 사회와 시대를 지탱하며 떠받쳐주는,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이 아닐까 싶다.
여수 어항단지 수협공판장에서였다. 새벽 다섯 시가 되자, 여기저기서 장화를 신은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이 뚜벅뚜벅 모여들었다. 잠시 후 벨이 울리자, 고기상자를 빙 둘러싸고 경매입찰에 들어가기 전에, 그들은 구령에 맞추어 모자를 벗고 마주보며 정중하게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이 장면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오늘날 우리 대학이나 기업체에서, 교수와 학생간에 혹은 경영진과 근로자 사이에 이런 정중한 인사가 교환된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정중한 인사는 고사하고 막말로 하자면, 개 닭 쳐다보듯 스치고 지나치기 일쑤 아닌가. 이와 같은 인간관계 속에서 어떻게 학문이 연마되고 진리탐구 행해지며 생산과 경영이 이루어지는지 자못 궁금할 따름이다.
입찰이 끝나자마자 곁에 늘어서 있던 아주머니들이 우루루 몰려들어 필요한 고기상자들을 저마다 챙겼다. 이윽고 트럭들이 부릉부릉 시동을 걸고 고기상자를 실어내었다. 새벽 바닷가에서 비릿비릿한 삶의 활기에 넘치는 우리 이웃들의 그 건강한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 분들이야말로 이 땅의 이름 없는 주인이구나 싶었다.
전라북도 김제의 만경들에서였다. 한해 농사를 짓기 우해 벌써부터 논을 갈아 못자리판을 만드느라 이른 아침부터 들녘에는 여기저기서 일손들이 바삐 돌아갔다. 아침 안개 속에서 묵묵히 못자리판을 고르고 볍씨를 부리는 우리 농부들의 모습에서 거룩한 성화를 대하는 것 같았다.
누가 그분들을 가리켜 흙의 노예라고 하는가. 어떤 정치꾼들이, 혹은 어떤 투기꾼들이 무슨 짓을 하건 말없이 흙을 일구어 씨뿌리고 거두면서 자연의 질서 안에서 자신의 삶을 한해 두해 차곡차곡 쌓아 가는 사람들,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농사인 줄 뻔히 알면서도, 조상대대로 이어 내려온 농사를 포기하지 않고 양식을 생산해서 공급해 주고 있는 그들이 어찌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이 아니겠는가.
잠을 설쳐가며 시골에서 밤차로 올라와 꼭두새벽 동대문 의류도매시장에서 옷가지를 떼어다가 파는 우리 이웃들 또한 건강한 이 땅의 주인이다.
종로에서 을지로에서 도는 퇴계로에서 남들은 잠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인 이른 아침 길거리에 나와 버려진 쓰레기와 휴지를 묵묵히 치우고 있는 청소부들 또한 이 땅의 주인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이런 분들은 사회현실에 대해 말이 없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삶에 충실한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뜻과 생각마저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말이 없는 가운데서도 그들의 뜻과 생각은 도도히 흐르는 강물처럼 시대의 흐름과 역사의 향방에 결적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라고 나는 믿고 싶다.
영화 [간디]를 보면서 오늘날 우리 현실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사회 운동이 되었건 간에 그 운동에 긍정적인 평가와 가치를 부여하려면 그 운동이 곧 개인의 인격형성과 이어져야 할 것이다. 목적달성만을 위해 수단방법을 도외시한다면 그것은 결코 건전한 운동이 될 수 없고 인격형성의 길일 수도 없다. 비폭력에 대해서 마하트마 간디는 이런 마을 한다.
“우리는 절대로 폭력을 쓰지 말고 얻어맞기만 하자. 그리고 우리의 고통을 통해서 저들(영국)이 저지른 불의를 제대로 보게 하자.” 그들이 겪은 비폭력 불복종의 고통은 마침내 그들의 승리를 가져 온다. 간디는 또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폭동을 일으키고 반격을 가하면 우리는 야만인이 되고 저들은 법이 된다. 그러나 그들의 공격을 우리가 참고 견디면 저들이 야만인이 되고 신과 진리는 우리 편이 될 것이다.”
눈에는 눈으로 맞선다면 온 세계가 장님이 되는 길밖에 없을 거라고 하면서, 자신이 절망에 빠졌을 때 털고 얼어선 그 극복의 의지를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절망에 바질 때마다 나는 역사적으로 어느 시대에서나 진리와 사랑이 항상 승리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되고 있는 제도권의 음성적인 폭력이나 운동권의 양성적인 폭력을 가릴 것 없이 다 같이 냉정하게 되돌아보아야 한다. 눈앞 일에만 급급하지 말고 긴 안목으로 볼 때, 인류역사는 순수와 폭력으로써가 아니라, 오로지 진리와 사랑의 승리를 가져왔다는 그 교훈을 거듭거듭 상기해야 한다.
나라의 다스림을 국민들로부터 위임받은 정치권에서는 여나 야를 물을 것 없이 목소리 큰 사람들이 곧 이 땅의 주인인 것처럼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이 맡은 소임에 한결같이 성실하게 임하면서 묵묵히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선량한 서민들이야말로 이 땅의 진정한 주인임을 알아달라는 말이다. 그들은 말이 없는 가운데 우리 사회와 시대를 지탱하면 만들어가는 소박하지만 건강한 사람들이다.
요 몇 해 동안 우리는 허구한 날 똑같이 소리 높이 외치고 점거농성하고 짓부수며 불태우고, 걷어차며 두들기고 쏘아대면 잡아 가두는 소식만을 지겹도록 접해왔다. 이토록 흉흉하고 살벌한 장면만을 보고 들으면서 이 땅의 암울한 공기를 마셔온 우리들이다. 모처럼 산하대지에 번지고 있는 싱그러운 봄의 신록과 생업에 열심히 종사하고 있는 건강하고 선량한 우리 이웃들을 가까이서 대하니, 생의 활기 같은 것이 내 안에서도 움트는 것 같았다.
우리 시대를 지탱하며 만들어가는 사람들은 과연 누구일까 하고 근래에 곰곰 생각하게 된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 등을 주무르는 사람들이 이 나라와 우리 시대를 이끌어가는 주역들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그들은 겉으로 드러난 한낱 파도와 같은 존재일 뿐. 파도는 바람이 불어야 일렁거리지, 그 자체로서는 옴짝할 수 없다. 파도의 밑바탕은 끝없이 괴어 있는 바다와 도도히 흐르는 강물이다. 파도는 바람을 타고 바다에서 일어났다가 바람이 자면 다시 바닷물로 잦아든다.
인류역사상 한때의 바람을 타고 솟아났다가 소멸해 버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그 정권들 또한 이 파도와 같은 것들이다. 파도는 기상 상태에 의해 일렁거리다가 잦자들지만, 바다는 시작도 끝도 없이 늘 그 자리에 서 있다. 삶 그 자체에 충실한 기층민들이야말로 우리 사회와 시대를 지탱하며 떠받쳐주는,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이 아닐까 싶다.
여수 어항단지 수협공판장에서였다. 새벽 다섯 시가 되자, 여기저기서 장화를 신은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이 뚜벅뚜벅 모여들었다. 잠시 후 벨이 울리자, 고기상자를 빙 둘러싸고 경매입찰에 들어가기 전에, 그들은 구령에 맞추어 모자를 벗고 마주보며 정중하게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이 장면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오늘날 우리 대학이나 기업체에서, 교수와 학생간에 혹은 경영진과 근로자 사이에 이런 정중한 인사가 교환된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정중한 인사는 고사하고 막말로 하자면, 개 닭 쳐다보듯 스치고 지나치기 일쑤 아닌가. 이와 같은 인간관계 속에서 어떻게 학문이 연마되고 진리탐구 행해지며 생산과 경영이 이루어지는지 자못 궁금할 따름이다.
입찰이 끝나자마자 곁에 늘어서 있던 아주머니들이 우루루 몰려들어 필요한 고기상자들을 저마다 챙겼다. 이윽고 트럭들이 부릉부릉 시동을 걸고 고기상자를 실어내었다. 새벽 바닷가에서 비릿비릿한 삶의 활기에 넘치는 우리 이웃들의 그 건강한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 분들이야말로 이 땅의 이름 없는 주인이구나 싶었다.
전라북도 김제의 만경들에서였다. 한해 농사를 짓기 우해 벌써부터 논을 갈아 못자리판을 만드느라 이른 아침부터 들녘에는 여기저기서 일손들이 바삐 돌아갔다. 아침 안개 속에서 묵묵히 못자리판을 고르고 볍씨를 부리는 우리 농부들의 모습에서 거룩한 성화를 대하는 것 같았다.
누가 그분들을 가리켜 흙의 노예라고 하는가. 어떤 정치꾼들이, 혹은 어떤 투기꾼들이 무슨 짓을 하건 말없이 흙을 일구어 씨뿌리고 거두면서 자연의 질서 안에서 자신의 삶을 한해 두해 차곡차곡 쌓아 가는 사람들,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농사인 줄 뻔히 알면서도, 조상대대로 이어 내려온 농사를 포기하지 않고 양식을 생산해서 공급해 주고 있는 그들이 어찌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이 아니겠는가.
잠을 설쳐가며 시골에서 밤차로 올라와 꼭두새벽 동대문 의류도매시장에서 옷가지를 떼어다가 파는 우리 이웃들 또한 건강한 이 땅의 주인이다.
종로에서 을지로에서 도는 퇴계로에서 남들은 잠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인 이른 아침 길거리에 나와 버려진 쓰레기와 휴지를 묵묵히 치우고 있는 청소부들 또한 이 땅의 주인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이런 분들은 사회현실에 대해 말이 없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삶에 충실한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뜻과 생각마저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말이 없는 가운데서도 그들의 뜻과 생각은 도도히 흐르는 강물처럼 시대의 흐름과 역사의 향방에 결적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라고 나는 믿고 싶다.
영화 [간디]를 보면서 오늘날 우리 현실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사회 운동이 되었건 간에 그 운동에 긍정적인 평가와 가치를 부여하려면 그 운동이 곧 개인의 인격형성과 이어져야 할 것이다. 목적달성만을 위해 수단방법을 도외시한다면 그것은 결코 건전한 운동이 될 수 없고 인격형성의 길일 수도 없다. 비폭력에 대해서 마하트마 간디는 이런 마을 한다.
“우리는 절대로 폭력을 쓰지 말고 얻어맞기만 하자. 그리고 우리의 고통을 통해서 저들(영국)이 저지른 불의를 제대로 보게 하자.” 그들이 겪은 비폭력 불복종의 고통은 마침내 그들의 승리를 가져 온다. 간디는 또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폭동을 일으키고 반격을 가하면 우리는 야만인이 되고 저들은 법이 된다. 그러나 그들의 공격을 우리가 참고 견디면 저들이 야만인이 되고 신과 진리는 우리 편이 될 것이다.”
눈에는 눈으로 맞선다면 온 세계가 장님이 되는 길밖에 없을 거라고 하면서, 자신이 절망에 빠졌을 때 털고 얼어선 그 극복의 의지를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절망에 바질 때마다 나는 역사적으로 어느 시대에서나 진리와 사랑이 항상 승리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되고 있는 제도권의 음성적인 폭력이나 운동권의 양성적인 폭력을 가릴 것 없이 다 같이 냉정하게 되돌아보아야 한다. 눈앞 일에만 급급하지 말고 긴 안목으로 볼 때, 인류역사는 순수와 폭력으로써가 아니라, 오로지 진리와 사랑의 승리를 가져왔다는 그 교훈을 거듭거듭 상기해야 한다.
나라의 다스림을 국민들로부터 위임받은 정치권에서는 여나 야를 물을 것 없이 목소리 큰 사람들이 곧 이 땅의 주인인 것처럼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이 맡은 소임에 한결같이 성실하게 임하면서 묵묵히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선량한 서민들이야말로 이 땅의 진정한 주인임을 알아달라는 말이다. 그들은 말이 없는 가운데 우리 사회와 시대를 지탱하면 만들어가는 소박하지만 건강한 사람들이다.
(89 . 4. 26)
글출처 : 텅 빈 충만(법정스님 : 샘터)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