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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을 쳐야겠네

오작교 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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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물소리 바람소리
    그제 밤부터 비가 내리고 있다. 입하(立夏) 무렵이라서인지 이따금 장대비로 줄기차게 내린다. 고사리 장마인가? 며칠 전부터 피어나기 시작한 모란이 후줄근히 비에 젖어 꽃잎을 다물고 있다. 별러서 모처럼 핀 꽃인데 비에 젖은 걸 보니 안쓰러운 생각이 든다.

    이번 비로 그새 가뭄이 풀리고 고사리 새순도 돋아나겠다. 산 너머 오마실 마을에 사는 아주머니들 말로는, 고사리장마가 져야 햇고사리가 많이 올라올 텐데 날씨가 가물어 고사리가 올라오지 않는다고, 산길에서 마주치자 푸념이었다.

    이 비가 개면 대숲머리로 젖빛 안개가 피어오를 것이고, 쭉죽 쭉죽... 머슴새가 초저녁과 새벽으로 울어댈 것이다. 소쩍새는 벌써부터 밤을 울어 에고 있다. 꾀꼬리와 뻐꾸기, 그리고 밀화부리도 멀지 않아 찾아 올 것이다.

    철새들이 찾아와 귀에 익은 그 목청으로 첫 곡조를 보내올 때, 반갑고 기특해서 내 가슴은 설렌다. 낮에 땔감을 들이다가 후박나무를 쳐다보았더니 새로 펼쳐진 잎 사이로 어느새 여기저기 꽃망울이 맺혀 있었다. 봄이 간 자리에 여름이 내리고 있다. 어김없는 계절의 변화.

    이번 비로 상치와 쑥갓, 아욱이 불쑥 자랐다. 씨앗을 벌써 한 달 전에 뿌렸는데 야지(野地)가 아닌 산중이라 이따금 서리도 내리고 하여 아주 더디게 자란다. 가뭄 끝에 내린 비라 떡잎들이 무척 좋아할 것이다. 아침에 보니 산토끼가 한 마리 채소밭에 웅크리고 있다가 내 기침소리에 놀라 달아났다.

    호박도 두 구덩이 파서 상치보다 일찍 씨앗을 묻었었다. 떡잎이 올라온 걸 보고 씌웠던 비닐을 벗겨 주었더니 부동자세로 전혀 자라지를 않았다. 농사에 경험이 적어 비닐을 너무 일직 걷은 탓이다. 그러나 이번 비에 새잎을 피우고 있다. 날이 들면 모종을 나누어 곯아버린 구덩이에도 옮겨 심어야겠다.

    숙경이한테서 시집간다는 편지를 받고 뭘 해줄까 했는데, 마침 빈 부채가 한 자루 생겨 목월의 시집 [산도화]에서 ‘밭을 갈아’를 써두었다. 후렴으로 되풀이 되는 ‘꾸륵꾸륵 비둘기야’는 번다해서 중간을 빼버리고.
밭을 갈아 콩을 심고
밭을 갈아 콩을 심고
    꾸륵구륵 비둘기야

백양 잘라 집을 지어
초가삼간 집을 지어

대를 심어 바람 막고
태를 심어 퉁소 뚫고

장독 뒤에 더덕 심고
장독 앞에 모란 심고

웃말 색시 모셔 두고
반단 색시 모셔 두고

햇볕나면 밭을 가록
달빛 나면 퉁소 불고
    꾸륵꾸륵 비둘기야
이런 정경이 물로 요즘 세상에는 꿈같은 이야기지만, 가슴 한쪽에 그런 꿈이라도 지니고 살아야 사람은 덜 찌든다. 비록 어떤 아파트 단지의 몇 호집 아줌마로 산다 할지라도 흙에 이어진 그런 꿈을 지니고 살아간다면 그들의 삶은 결코 시들지 않을 것이다. 사람에게 꿈이 없으면 삶의 탄력마저 사라지니까.

    꿈같은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읽을 때마다 나는 마치 전생의 황홀한 들을 거닐고 있는 것 같은 그런 감흥이다. 오늘처럼 닳아지고 찌든 현대인의 머리로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설사 그것이 역사적인 사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우리가 지닐 수 있는 애틋한 소망과 삶의 진실이 담겨 있다. 신화가 지닌 미적 감동은 가슴으로 받아들여야지 머리로써 꼬치꼬치 따지려고 들면 결코 이해할 수 없다.

    화가 이만익씨가 엮은 [그림으로 보는 삼국유사]를 펼쳐보면서 요 며칠 동안 내 마음은 향기로운 꽃밭에서 노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단순해서 마음이 편안한 그림과 그 밑에 달고 있는 ‘작가의 말’에서 옛일에 대한 그리움이 한결 살뜰해진다.

    ‘선덕여왕도(善德女王圖)’에서 작가의 말은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선덕여왕은 지혜롭고 아름답고 착한 분이었던 것 같다. 여왕의 지기삼사(知機三事)는 널리 알려진 일로 여왕의 총명함이 빛났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여왕을 신라의 온 백성이 흠모하였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지귀(志鬼)라는 못난 사내가 여왕을 홀로 사모하다 상사병으로 미쳤다고 하자, 여왕은 지쳐 쓰러져 잠든 지귀의 품에 당신이 지니던 팔찌를 슬며시 얹어 주었다고 한다. 이는 마치 자비로운 미소로 신라 천년을 보낸 미륵반가사유상이 턱을 괴었던 손을 살며시 풀어 슬픈 중생을 만져주려 하는 그런 표정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이런 여왕이 다스리던 땅의 공기는 얼마나 맑고 향기로웠을까. 후덕하고 인자한 덕의 향기로 인해, 요즘처럼 봄철 내내 눈물과 재채기와 콧물로 괴로움을 당해야 하는 무고한 백성들은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 시절에는 최루탄을 대량으로 생산, 경향 각지에서 쏘아댈 그런 정치적인 불안도 없었을 테니까.

    지나간 우리 왕조사를 훑어보면, 어진 통치자들이 있어 태평성세를 누린 적도 없지 않았지만, 때로는 연산군이나 광해군과 같은 포악한 군주들과 못된 간신배들에게 놀아난 무능하고 머저리 같은 군왕들이 있어 선량한 백성들에게 많은 피해와 고통을 주었었다.

    [삼국유사] 권 2에는 신라의 경덕왕과 충담스님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스님은 삼월 삼짇날 서라벌의 남산 삼화령에 계시는 미륵불에게 차를 달여 공양하고 돌아오는 길에 왕과 마주친다. 백성을 다스려 편안케 할 노래를 지어달라는 왕의 청을 받고, 스님은 즉석에서 다음과 같은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들려준다.
왕은 아비요 신하는 사랑하실 어미시라
백성을 어여쁜 아이로 여기시면
백성이 그 사랑을 알리다(중략)
아, 왕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할지면
나라 안이 태평하리이다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나 관료나 국민들 각자가 자신이 들어설 자리인지 아닌지 자기 분수부터 알고 처신한다면 온갖 갈등과 불안이 해소되어 태평할 거라는 이야기. 농민들은 농사에, 근로자는 산업에, 학생들은 학업에, 군인들은 오로지 국토방위에만 전념할 때 건전한 사회가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표현은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사리의 정곡을 찌르고 있다.

    ‘안민가’를 듣고 왕은 가상히 여기어 왕사(王師)로 봉하려 하지만 충담은 사양하고 그 직위를 받지 않는다. 국정자문위원이 되는 것은 수행자답지 않은 처신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 비가 개면 나는 우물부터 말끔히 치고 채소밭에 김을 매주어야겠다. 그것은 오로지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85. 6)
글출처 : 물소리 바람소리 中에서.....
 
 

  
2010.07.20 (23:26:27)
CCa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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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255.163.226)
  
2010.07.22 (17:55:24)
[레벨:29]id: 오작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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