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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에 기대다

오작교 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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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물소리 바람소리

    가을바람이 선들거리면 불쑥불쑥 길을 떠나고 싶은 충동에 산거(山居)를 지키고 있기가 어렵다. 그리고 맨날 똑같은 먹이와 틀에 박힌 생활에 더러는 염증이 생기려고 한다. 다른 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잘 지내다가도 해마다 10월 하순께가 되면 묵은 병이 도지듯 문득 나그네 길을 떠나고 싶다.

    그날도 점심공양을 끝내고 세상 소식 좀 듣다가 여느 때처럼 뜰에 나와 장작을 패고 있었다. 오동나무와 후박나무에서 마른 바람결에 뚝 뚝 지는 낙엽을 보고 있으니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서둘러 짐을 챙겨가지고 길을 떠나오고 말았다.

    삶이 하나의 흐름이라는 걸 실감한다. 그 어떤 형태의 삶이라 할지라도 틀에 갇혀 안주하다 보면 굳어져 버린다. 굳어지면 고인 물처럼 생기를 잃는다. 사람은 동물이라 움직임이 없으면 무디어지고 또한 시들고 만다. 살아 있는 것은 무엇이든 모두가 움직이고 있다. 변화가 없는 삶은 이내 침체되고 무기력해진다. 그리고 진부하고 지루해지게 마련. 생활에 리듬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 같다.

    다행히 우리 같은 종류의 인간들은 거치적거리는 관계의 이웃이 없기 때문에 마음먹은 대로 손쉽게 떠나올 수 있다. 물론 자기 자신의 무게 말고도 공동체의 무게에 대한 연대감이라는 짐을 지고 있긴 하지만.

    혼자서 나그네가 되면 가장 투명하고 순수해진다. 낯선 환경에 놓여 있을 때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눈을 뜬다. 자기 모습이 뚜렷이 드러난다. 개체(個體)가 된다는 것은 곧 자유로워지는 것. 그리고 온전한 휴식을 누릴 수 있다. 사람은 이와 같은 휴식을 통해서 새로운 힘을 축적하게 되고 일을 통해서만 휴식을 얻을 수가 있다. 평소에 일이 없는 사람들은 진정한 휴식도 누릴 수 없다. 휴식과 일은 그런 상관관계를 지닌다.

    이제 새삼스럽게 구경거리를 찾아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할 필요는 없다. 어디를 가나 토막 난 비좁은 땅덩이에서는 거기가 거기이고 비슷비슷한 모습들이니까. 그 고장의 냄새를 맡는 일로써 나그네의 시장기 같은 것을 채우면 된다.

    표현은 ‘냄새’라고 했지만 또 다른 말을 쓴다면 분위기를 느끼는 일일 것이다. 낯선 고장에 가면 우선 시장에 들러 보라. 거기 가면 그 고장 특유의 말씨가 있고 생활이 있고 인정과 습속과 빛깔이 있다. 그 말씨와 생활과 인정, 습속, 빛깔이 그 고장의 분위기를 이룬다.

    이런 분위기를 빈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머리로써가 아니라 텅 빈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머리는 어떤 의미에서 불순하다. 다지고 캐고 의심하고 자꾸만 묻기 때문이다. 그 같은 잿빛 이론과 논리가 우리를 지금껏 피곤하게 하면서 마음을 열지 못하도록 방해를 해왔다.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트인 사람이 될 수 없다.

    전문가들의 주장에 의하면, 우리는 한평생을 두고 우리가 가진 능력의 5%밖에 쓰지 않는다고 한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사실ㄹ이다. 어째서 우리가 지닌 무한한 잠재력 가운데서 겨우 5%밖에 쓰지 못한단 말인가. 그것은 마음이 겹겹으로 닫힌 채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관계와 사물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머리로써 따지고 쪼개고 의심하면서 거기에 이유를 달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불순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텅 빈 마음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인다.

    마침 볼일도 있어 부산에 내려갔다가 아침 일직 자갈치 시장에를 들렀다. 언제부터 한번 들르고 싶은 곳이었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에 큰마음 먹고 들르게 되었다. 생선을 경매하는 이 자갈치시장은 분명히 부산 특유의 분위기이고 명물이다. 뭐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노래하듯 숫자를 읊고 수화(手話)로 말하는 경매 풍경은 딴 세상일처럼 느껴진다. 바로 그 곁에는 즐비한 생선가게.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인연이 먼 생선이지만, 거기 비릿비릿한 생의 열기 같은 것이 넘쳐 있어 아침 바닷가를 더욱 신선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회사의 사무원이나 관공서의 공무원에 견주면 생선가게에서 일하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건강하고 당당한 삶을 이루고 있는지 한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관념적인 인간이 아니라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탄탄한 사람들이다. 곁에서 보기만 해도 생의 열기가 묻어오는 것 같다.

    어제ㅓ는 모슬포에서 신창 쪽으로 가는 길목 동일리 바닷가에서 수평선으로 지는 장엄한 일몰을 ‘참배’했었다. 굳이 참배라는 말을 쓴 것은 그 어떤 종교적인 의식보다도 말고 고요하고 숙연한 침묵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진실로 신비롭고 아름답다.

    풀끝에 맺힌 이슬만 하더라도 그렇고 해가 지는 모습과 저녁노을만 하더라도 그지없이 신비스럽고 아름답다. 추한 것은 우리들 인간뿐인가 싶으니 자연 앞에 서기가 조금은 미안하다.

    한라산 자락마다 억새풀이 허옇게 은발을 휘날리고 있는 것을 바라볼 때, 목장에서 양떼들이 혹은 말들이 자유롭게 풀을 뜯고 있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때, 헐벗고 때묻고 초라한 존재는 갈 데 없는 우리들 인간이구나 싶었다.

    모든 존재는 다 자기의 분수대로 있을 자리에 있으면서 우주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사람만이 그 조화에서 이탈하려고 자꾸만 몸부림을 치고 있다. 같은 인간끼리 미워하고 싸우면서 그 조화와 질서를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묵묵히 주주 질서에 이바지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너무 떠들면서 살벌하다. 오늘날 지구가 곳곳에서 갖은 형태로 폭발을 하고 있는 것도, 그럴듯한 이유를 내세우면서 분수 밖의 행동으로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그 메아리가 아닌가 싶다.

    우리가 인간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은 더 물을 것도 없이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삶 자체가 확고한 기반 위에 서야 한다. 안팎으로 어지러울 때에는 신앙인이 아니라도 기도할 줄을 알아야 한다.

    기도는 말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귀 기울이는 일. 입을 다물어야 깊은 뜻을 지닌 말씀을 들을 수 있다. 침묵은 근원으로 돌아가는 길이니까.

    이따금 우리들은 자기 자신을 탐구하기 위해 침묵의 세계에 기댈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우주의 조화에 동참할 수 있다.

(83. 12)

글출처 : 물소리 바람소리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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