힌국인의 맹렬성
동북아시아에 있는 한반도는 겨울이 몹시 춥다. 겨울철에 해외에서 돌아와 보면 그 추위를 온몸으로 실감할 수 있다. 지난해 겨울 인도와 동남아 일대를 다니다가 연초에 귀국했을 때 그날 서울의 아침 기온이 여하 18도라고 했다. 김포공항에 내리자, 정신이 번쩍 들고 여기저기서 잽싸게 움직이는 동작들이 이내 눈에 띄었다. 우리 한국인의 성급하고 화끈한 성미도 이런 기후에 영향을 많이 받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태평양을 건너 김포공항에 내리니 아침 기온이 13도라고 했다. 캘리포니아의 태평양 연안에서 자목련과 배꽃이며 철쭉과 양귀비가 화사하게 봄 치장을 하는 모습을 보고 오니 우수절(雨水節)의 늦추위가 뼛속에까지 파고드는 것 같았다.
광활한 대륙에서 지내다가 한반도에 들어서면 모은 게 비좁고 왜소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행동거지들이 하나같이 성급하고 조급하고 거칠게 보인다. 그 속에 묻혀 살 때는 모르다가도 남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돌아와 보면 이내 우리들의 그런 실상을 새삼스럽게 인식하게 된다.
땅이 비좁은 데서 오는 자연환경의 영향이 크겠지만, 우리 사회가 지닌 인문 사회적인 환경 탓도 없지 않을 것 같다. 제방 상황과 여건이 다른 남 나라의 경우와 비교하는 일은 부질없는 것이지만, 사람이 어울려 살아가는 삶의 현실은 크게 다르지 않다.
넓은 곳에서 사는 사람들이 무슨 일에나 느긋하고 여유 있게 보이는 것은 그들의 생활환경이 그렇게 뒤받쳐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고속도로의 체계만 하더라도 미국의 경우는 드넓은 땅이기 때문에 빠져나가는 길을 미리미리 예고하는 표시판이 친절하고 자상하게 되어 있다. 어쩌다 그 길을 놓칠 경우라도 다음 거리에서 내려 돌아가면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한번 놓치면 할 수 없디 다른 도시까지 가서야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이러니 그 단 한 번의 기회를 놓칠세라 조급하고 성급하게 뛰지 않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남에게 섣불리 양보했다가는 자기 차례를 영원히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에서 더욱 야박하고 살벌하게 처신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이 어울려 사는 인간 세상에 어떻게 자기 몫을 챙기는 데만 급급할 수 있겠는가. 함께 사는 이웃을 보살피면서 서로가 사양하고 너그럽게 받아들임으로써 막혔던 도로만이 아니라 인간의 길이 소통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아침 서울의 기온은 올해 들어 가장 추운 영하 14도라고 한다. 천지가 꽁꽁 얼어붙은 이 추위 속에 시내의 어떤 절 신도들은 서해가 있는 충청남도의 간월도까지 방생하러 가느라고 새벽부터 설쳐대고 있었다. 정초 산중 기도 회향을 바닷가에 가서 하는 방생으로써 법회를 삼는다고 한다. 망둥이 몇 마리 바닷물에 넣어주기 위해 세 시간도 더 걸리는 머나먼 길을 차로 달려간단다.
절 앞에 버스가 세 대나 어둠 속에 대기하고 있는 걸 보고, 법회치고는 참으로 맹렬한 법회구나 싶었다.
이런 맹렬한 행사가 ‘법회’의 이름으로 행해진다니, 이것이 진정한 불교일까 하고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 방생(放生)의 근본 뜻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누군가 바다에서 잡은 망둥이(고기의 일종)를 다시 바다에 넣어주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 추위 속에 동원된 것이다.
멀리 서해바다까지 가서 돈 주고 고기를 사서 놓아주는 그런 형식적인 방생보다는 추위에 헐벗고 굶주리는 가까운 이웃들을 보살피고 도와주는 일이 방생의 본뜻임을 알아야 한다. 불법(佛法) 만나기도 어렵지만 정법(正法) 만나기는 더욱 어렵다는 말이 생각되는 아침이었다.
이런 맹렬성이 어떤 종파에선 또 산상 기도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다. 기도를 산에서만 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기도란 말할 것도 없이 마음을 활짝 여는 일이다. 마음이 열려야 본래부터 열려 있는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다.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받아들일 때 세상과 내가 하나가 되어 뜻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마음이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 존재하는 것이지 어떤 특정한 장소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오늘 같은 추위에 떼 지어 방생하러 가는 그 맹렬성을 보면서 신앙이란 얼마나 맹목적이고 반(反)이성적인가를 되돌아보았다. 그런 맹목적인 열기와 맹렬성을 올바른 신심(信心)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신심은 투명한 마음이고 맑은 마음이며 또한 평온한 마음이다. 투명하고 밝고 평온한 그 마음이 사리를 분별하고, 바른 것과 그릇된 것을 가려볼 수 있게 한다.
요즘 이 땅의 일부 종교계에서는 영리를 추구하는 일부 출판업자들과 어울려 종말론(終末論)을 가지고 가뜩이나 어지러운 세상을 더욱 어지럽게 하고 있다. 예수가 진짜 신도를 공중으로 들어 올려 그들만을 환란에서 구한다는 것이다. 어떤 얼빠진 광신자는 92년에 이 미증유의 사건이 있을 거라고 하면서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한다.
한마디로 웃기는 수작이다. 이런 말에 현혹되어 불안에 떠는 순진한 사람도 없지 않겠지만, 이런 것이 과연 올바른 종교이고 신앙이겠는가.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이런 허무맹랑한 소리에 현혹되게 마련이다.
이런 종말론과 한국인의 그 맹렬성이 어떤 상관관계에 있을지, 시간이 남아도는 한가한 사람들이 있다면 한번 헤아려볼 일이다.
글출처 : 버리고 떠나기(法頂 스님, 샘터) 中에서......
어제 태평양을 건너 김포공항에 내리니 아침 기온이 13도라고 했다. 캘리포니아의 태평양 연안에서 자목련과 배꽃이며 철쭉과 양귀비가 화사하게 봄 치장을 하는 모습을 보고 오니 우수절(雨水節)의 늦추위가 뼛속에까지 파고드는 것 같았다.
광활한 대륙에서 지내다가 한반도에 들어서면 모은 게 비좁고 왜소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행동거지들이 하나같이 성급하고 조급하고 거칠게 보인다. 그 속에 묻혀 살 때는 모르다가도 남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돌아와 보면 이내 우리들의 그런 실상을 새삼스럽게 인식하게 된다.
땅이 비좁은 데서 오는 자연환경의 영향이 크겠지만, 우리 사회가 지닌 인문 사회적인 환경 탓도 없지 않을 것 같다. 제방 상황과 여건이 다른 남 나라의 경우와 비교하는 일은 부질없는 것이지만, 사람이 어울려 살아가는 삶의 현실은 크게 다르지 않다.
넓은 곳에서 사는 사람들이 무슨 일에나 느긋하고 여유 있게 보이는 것은 그들의 생활환경이 그렇게 뒤받쳐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고속도로의 체계만 하더라도 미국의 경우는 드넓은 땅이기 때문에 빠져나가는 길을 미리미리 예고하는 표시판이 친절하고 자상하게 되어 있다. 어쩌다 그 길을 놓칠 경우라도 다음 거리에서 내려 돌아가면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한번 놓치면 할 수 없디 다른 도시까지 가서야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이러니 그 단 한 번의 기회를 놓칠세라 조급하고 성급하게 뛰지 않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남에게 섣불리 양보했다가는 자기 차례를 영원히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에서 더욱 야박하고 살벌하게 처신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이 어울려 사는 인간 세상에 어떻게 자기 몫을 챙기는 데만 급급할 수 있겠는가. 함께 사는 이웃을 보살피면서 서로가 사양하고 너그럽게 받아들임으로써 막혔던 도로만이 아니라 인간의 길이 소통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아침 서울의 기온은 올해 들어 가장 추운 영하 14도라고 한다. 천지가 꽁꽁 얼어붙은 이 추위 속에 시내의 어떤 절 신도들은 서해가 있는 충청남도의 간월도까지 방생하러 가느라고 새벽부터 설쳐대고 있었다. 정초 산중 기도 회향을 바닷가에 가서 하는 방생으로써 법회를 삼는다고 한다. 망둥이 몇 마리 바닷물에 넣어주기 위해 세 시간도 더 걸리는 머나먼 길을 차로 달려간단다.
절 앞에 버스가 세 대나 어둠 속에 대기하고 있는 걸 보고, 법회치고는 참으로 맹렬한 법회구나 싶었다.
이런 맹렬한 행사가 ‘법회’의 이름으로 행해진다니, 이것이 진정한 불교일까 하고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 방생(放生)의 근본 뜻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누군가 바다에서 잡은 망둥이(고기의 일종)를 다시 바다에 넣어주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 추위 속에 동원된 것이다.
멀리 서해바다까지 가서 돈 주고 고기를 사서 놓아주는 그런 형식적인 방생보다는 추위에 헐벗고 굶주리는 가까운 이웃들을 보살피고 도와주는 일이 방생의 본뜻임을 알아야 한다. 불법(佛法) 만나기도 어렵지만 정법(正法) 만나기는 더욱 어렵다는 말이 생각되는 아침이었다.
이런 맹렬성이 어떤 종파에선 또 산상 기도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다. 기도를 산에서만 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기도란 말할 것도 없이 마음을 활짝 여는 일이다. 마음이 열려야 본래부터 열려 있는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다.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받아들일 때 세상과 내가 하나가 되어 뜻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마음이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 존재하는 것이지 어떤 특정한 장소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오늘 같은 추위에 떼 지어 방생하러 가는 그 맹렬성을 보면서 신앙이란 얼마나 맹목적이고 반(反)이성적인가를 되돌아보았다. 그런 맹목적인 열기와 맹렬성을 올바른 신심(信心)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신심은 투명한 마음이고 맑은 마음이며 또한 평온한 마음이다. 투명하고 밝고 평온한 그 마음이 사리를 분별하고, 바른 것과 그릇된 것을 가려볼 수 있게 한다.
요즘 이 땅의 일부 종교계에서는 영리를 추구하는 일부 출판업자들과 어울려 종말론(終末論)을 가지고 가뜩이나 어지러운 세상을 더욱 어지럽게 하고 있다. 예수가 진짜 신도를 공중으로 들어 올려 그들만을 환란에서 구한다는 것이다. 어떤 얼빠진 광신자는 92년에 이 미증유의 사건이 있을 거라고 하면서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한다.
한마디로 웃기는 수작이다. 이런 말에 현혹되어 불안에 떠는 순진한 사람도 없지 않겠지만, 이런 것이 과연 올바른 종교이고 신앙이겠는가.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이런 허무맹랑한 소리에 현혹되게 마련이다.
이런 종말론과 한국인의 그 맹렬성이 어떤 상관관계에 있을지, 시간이 남아도는 한가한 사람들이 있다면 한번 헤아려볼 일이다.
<91. 3>
글출처 : 버리고 떠나기(法頂 스님, 샘터) 中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