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아가기
  • 아래로
  • 위로
  • 목록
  • 댓글

입시에 낙방한 부모들에게

오작교 47

0
도서명 버리고 떠나기
   어제 해 질 녘, 얼마 전에 전기 대학입시를 치른 고3 학생이 한 사람 찾아왔습니다. 어린 녀석이 들어서면서부터 한숨이었습니다. 시험 잘 보았느냐고 의례적인 물음을 던지니, 잘 보고 못 보고를 챙길 것도 없이 그저 보는 체했을 뿐이라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기는 애초부터 대학에 진학할 마음이 없는데 부모들의 강요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시험을 치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더욱 괴로운 것은, 자기 아들은 틀림없이 합격할 거라고 믿고 있을 어머니와 아버지의 처지라고 했습니다.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아주 똑똑한 아이입니다. 왜 대학에 진학할 생각을 하지 않았느냐고 추궁하니까, 비정한 경쟁에다가 이기주의자들만 양산하는 오늘날의 대학 교육에 대해 자기는 회의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면서, 자기 자신만이라도 그런 무리 속에 끼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아직 세상의 탁류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어린 뜻이 가상하게 여 겨졌으면서도 나는 선뜻 그의 뜻에 동조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세상은 순수한 뜻만으로는 헤쳐 나가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글이 나갈 무렵에는 벌써 전기대학 입시의 결과가 발표되어, 집집마다 회비에 싸여 기쁨에 들뜨거나 비탄에 빠져 기가 죽어 있을 것입니다. 지난달 18일 입시가 있던 날 아침, 나는 예불 끝에 큰 소리로 이렇게 염원했습니다. 오늘 입시에 한 사람도 떨어지지 말고 모두 붙거라!

   자식을 두어본 경험이 없는 우리 같은 처지로는, 입시 문전에 자식을 세워 둔 부모들의 조마조마하고 초조하고 불안한 그 마음이야 몸소 체험할 길이 없지만, 사람의 일이니, 관념적으로나마 대강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한 여성 불자한테서 이런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살고 계시는 스님들이 부러운 입시의 계절입니다. 이 괴로움의 설명은 말이 아니기에 적을 수조차 없습니다. 요즘 우리들의 고민으로 부처님도 밤낮 시달리셔야 하고 우리보다 더 많은 고민이시겠지요. 우리 집에도 두 아이가 있어, 엄마라는 인연 때문에 함께 불안하고 초조해야 합니다. 이 절박한 숙제 앞에 꽉 차 있는 가슴의 열쇠입니다(이하 생략)."

   불안하고 초조한 열뇌로 찬 그 마음이 이제는 맑고 향기로운 바람으로 가득 차기를 빌 뿐입니다. 그렇지만 세상일이란 우리 뜻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니, 낙방의 고배를 마시더라도 너무 낙담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의 일이란 현재의 눈앞 일만 가지고 따지기에는 불가사의한 영역이 너무 많습니다. 오늘의 합격과 불합격에만 집착하지 마십시오. 전 인생의 과정을 두고 볼 때, 오늘의 합격이 행복을 보장한다고만은 볼 수 없고, 이번의 낙방이 불행으로 이어진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겪어서 알고 있듯이, 세상일이란 흉이 도리어 복이 될 수 있고 때로는 복이 재앙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둘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는 모두가 그 나름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무책임한 소리 같지만, 말을 좀 해야겠습니다. 사람에겐 저마다 자기 몫의 그릇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언젠가는 그 그릇을 채우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그릇이 차면 넘칩니다. 이런 도리를 안다면 눈앞의 합격과 불합격을 두고, 너무 좋아할 것도 아니고 비탄에 잠겨 기죽을 일도 아닙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학이 인생의 전부는 아닙니다. 전문지식에 흥미를 느끼고 그 속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할 사람들은 대학에 진학하여 학문을 습득해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굳이 ‘비정한 경쟁과 이기심으로 가득 찬’ 오늘의 대학에 진학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지 내 자신도 의문을 가질 때가 더러 있습니다.

   오늘날의 대학교육은 '사람'을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대학뿐 아니라 초. 중고등학교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경쟁심을 조장하고 직장을 얻고 결혼대상자를 고르는 데 유리한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을 뿐입니다.

   교육이 참으로 해야 할 일은 그럴듯한 직업을 얻도록 준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 과정을 이해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무엇이 진리이고 삶의 진실인지 스스로 찾아내도록 거드는 일입니다. 우리들의 삶이 그저 그렇고 그런 잿빛 일상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삶은 말할 수 없이 엄청난 신비입니다. 자신이 스스로 찾아내야할 신비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육이 하는 일은 기껏 직업을 갖는 수단이나 결혼을 하는 데 후광이 되고 무슨 보장을 받는 발판에 그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명문대학에 들어가 고등교육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인간다운 인간이 되지 못한다면, 자기 생각과 감정에 대한 깊은 내적 통찰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지 생각을 돌이켜보아야 합니다.

   인간의 밝은 심성에서 우러나온 지혜는 밖에서 얻어들은 지식과는 비교될 수도 없습니다. 지혜는 메마른 이론으로 입씨름하는 대학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교육받지 못한 사람이 교육받은 사람보다 훨씬 지혜로울 수도 있습니다. 오늘의 대학은 시험과 학위를 출세의 수단으로 삼으면서 삶의 진실을 등진 채 겉치레로 일관해 온 황량한 장소입니다.

   이런 장소와 대열에 끼지 못한 것을 두고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기량과 빛깔을 지니고 마음껏 뻗어나가야 할 어린 영혼이 어떤 틀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해서 슬퍼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참으로 전 존재를 기울여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이런 기회에 찾아내야 합니다. 대학의 통로만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므로, 아이들이 하고 싶은 일을 좋아서 하도록 마음 써 주십시오.

   시절 인연이 오면 저마다 자기 몫의 삶을 이룰 수 있도록 인내력을 가지고 지켜보십시오. 제발 그 우거지상을 거두고 한바탕 허허 웃으면서 털고 일어서십시오. 웃는 집에 복이 온다고 했습니다. 인생은 늘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한번 지나간 일에 갇히지 마십시오. <90.12>
<91. 01>

글출처 : 버리고 떠나기(法頂 스님, 샘터) 中에서......
공유
0
댓글 등록
취소 댓글 등록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댓글 삭제

"님의 댓글"

삭제하시겠습니까?

목록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법정스님의 의자 1 오작교 22.08.06.11:59 21664
normal
오작교 26.01.23.11:38 47
304
normal
오작교 25.12.09.11:11 1169
303
normal
오작교 25.10.28.10:52 1231
302
normal
오작교 25.08.18.11:56 1513
301
normal
오작교 25.06.11.10:23 1507
300
normal
오작교 25.04.01.09:36 1820
299
normal
오작교 25.02.28.10:09 2063
298
normal
오작교 25.01.16.10:15 1989
297
normal
오작교 25.01.16.09:34 1922
296
normal
오작교 24.11.20.15:59 2333
295
normal
오작교 24.08.23.10:35 2702
294
normal
오작교 24.07.03.13:00 3147
293
normal
오작교 24.06.05.13:56 3703
292
normal
오작교 24.02.26.11:16 4295
291
normal
오작교 23.12.15.10:56 4169
290
normal
오작교 23.07.15.15:03 4311
289
normal
오작교 23.07.15.14:07 4260
288
normal
오작교 23.06.28.09:33 4683
287
normal
오작교 23.06.28.09:14 5129
286
normal
오작교 23.04.27.15:33 44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