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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친구에게 / 버텨온 시간은 전부 내 힘이었다

오작교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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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야. 나는 가끔 세상 물정을 모르고 살고 싶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에 불을 켜고 찾는 게 아니라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며 토마토를 베어 물고, 어딘가에 누워 하늘을 보고 싶어. 조금 쉰다고 해서 조급함을 느끼거나 해야 할 일을 의무적으로 떠올리기도 싫어. 그냥, 가지고 있는 돈과 내가 가진 시간을 소모하며 적당히 하루를 살아가는 거지. 분명 여백이 가득할 거야. 나를 괴롭히던 강박에서 벗어났으니 말이야.


   오늘 먹었던 국수가 맛이 없어도 내일 가려 했던 냉면집이 인생 최고가 될지도 몰라. 그런데 나는 정해놓은 하루가 조금이라도 뒤틀리면 몸에 가시가 돋아나는 것 같아. 도로에서 울리는 모든 클락션이 나에게 향하는 것 같고, 인류애가 사라지는 기사 보면 삶이 덧없다고 생각해. 언젠가 오염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어. 혐오에 오염되지 말고, 자만에 오염되지 않고, 불행에 오염되지 말라고. 안타깝지만 이미 우린 오염되었어. 그 종류가 워낙 많아 셀 수가 있어야지. 사람들은 얼룩져 있고 오직 아이들만이 새로 산 셔츠처럼 깨끗해. 터무니없이 맑은 미소를 가진 아이를 보며 이 더러운 세상 속에서도 어떻게든 남은 순수와 여백을 지키리라 다짐했어. 그래서 말한 거야. 가끔은 세상 출정 모르고 그냥, 정말 그냥 살고 싶다고.


   유행하는 릴스나 드라마 따위 몰라도 좋아. 차라리 오래된 고전소설이나 90년대 포크에 열광할래.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는 정치 뉴스보단 인간극장을 보며 사람 사는 맛을 느낄래. 온종일 넷플릭스를 정주행하는 것보단 아무 전시회나 가서 그 작가가 피를 토해내며 만든 작품을 보고 싶어. 끝나고는 낯선 곳을 걸어보는 거야. 그러다 발견한 동네 밥집에서 맛있게 밥 한 공기를 비우는 것만큼 행복한 게 있을까? 그런 경험이 우릴 더 나은 삶으로 이끌 거야.

 

   철학자 칸트는 오후 3시마다 산책을 했대. 마냥 걷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색의 바다에서 수영을 했던 거지. 낯선 곳에서 오감을 열고 걸으면 뇌가 물렁물렁해지는 기분이야. 혹시 허공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있어? 그 사람은 분명 깊은 사색에 잠겨 있던 걸 거야. 나도 그렇게 되고 싶어. 조그마한 스마트 폰 속에서 손가락 하나에 휘발되는 콘텐츠에 시간을 쓰지 않고 옆에 있는 창을 바라보며 지나가는 계절을 촘촘히 눈에 담고 싶어. 전부 내가 할 수 있는 일임에도 어려운 건 이미 오염된 마음이 자극적인 것에 끌려서일 테야. 참을 수 없는 유혹인 걸 알아. 도망칠 수 없다는 것도. 그럼에도 이런 생각을 자꾸 하지 않으면 나는 초록색 인간이 되어버릴 거야. 그렇게 되면 너와 나누는 대화도 영영 사라질 수도 있어. 끔찍하지 않니? 


   있잖아.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게 있어. 다 큰 어른들이 확성기를 들고 경험이 최고라고 말하는 이유는 해보지 않고서는 절대 모를 때문이야. 전에 모리사와 아키오의 '무지개 꽃의 찻집'이라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어. 도쿄 치바현 끝에 있는 곳에서 작은 카페를 하는 주인장의 이야기인데 그곳에 오는 손님들에게 마법의 커피를 내려주며 삶을 위로해 주는 이야기야. 감명 깊게 읽어서 검색을 해봤는데 그곳이 실제로 있더라고! 얼마나 가습이 두근거리는지…. 기회가 된다면 그곳에서 쪽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싶었어. 번아웃이 온다면 아마 나의 목적지가 되었을 테지. 혹시 나 같은 사람이 있나 알아봤더니 실제로 다녀온 사람이 있었어. 책과 사뭇 다른 느낌이지만 거기에서 느낀 감정이 너무나 오묘해서 행복했다고 했어. 그리고 자신처럼 여길 다녀간 사람이 있다며 그들의 흔적은 블로그에 남겼지. 살펴보니 전부 다 나이를 먹은 어른이더라고.

 

   그들도 무언가에 홀려 거기까지 갔을 거야. 참 낭만적이지 않아? 소설 배경 장소에 실제로 가보는 일 말이야. 요즘은 여행 장소도 남들이 추천하는 곳으로 가잖아. 조금이라도 단점이 있다고 하면 다른 곳을 알아보기 바쁘고 가성비 따지랴, 거리 따지랴 정신이 하나도 없어. 내가 정말 가고 싶은 곳은 없을까? 나는 치바현에 있는 무지개 꽃 카페에 가보고 싶었어. 마음속에 품어두고 언젠가 떠나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지. 그런데도 사람들이 추천해 준 곳만 전전하기 바빴어. 경험했지만 타인의 경험을 따라 했을 뿐이야. 블로그를 쓴 그분은 도취적인 여행으로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하셨어. 멋있지 않니? 그런 경험이 또 다른 용기를 만들어. 다른 사람이 휘황찬란하게 만든 추천 영상을 봐도 시니컬하게 넘길 수 있지.

 

   경험이 없는 사람은 액정 안에서 열광해. 경험이 없는 사람은 액정 안에서 분노하고 슬퍼하고 사랑에 빠지지. 인터넷은 아주 일차원적인 정보를 보여줄 뿐 오감을 자극하진 못해. 아는 척도 그래, 아주 단편적인 것만 보고 안다고 착각하고 남을 판단하기 바쁘잖아? 마치 재판관이 된 듯 세상을 재단하고 그 와중에 오가는 인신공격과 싸움. 이제는 고개만 돌려도 쉽게 볼 수 있는 일이야. 경험한 것처럼 보이려는 인생이 가장 불행한 것 같아. 나도 알아. 경험은 아주 피곤하고, 느리고, 분주해야 하잖아. 그래서 나도 간접적인 경험으로 아는 척하기 바빠. 한 번은 그러는 내가 부끄러워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더는 추종하는 삶을 살지 않기로 했어. 나에겐 아직 펼치지 못한 낭만이 수두룩한걸. 


   친구야. 나는 경험을 추앙하려고 해. 경험에는 실패가 없잖아. 조금 지루하지만, 온전히 세상을 음미할 수 있다면 그런 것쯤이야. 알고리즘 따위에 취향을 넘겨주지 않고 직접 선택하며 살아가고 싶어. 비디오 대여점에서 하루 종일 영화를 골랐던 때처럼 말이야. 너는 그간 어떤 경험을 하고 살았어? 각자의 취향을 마구 공유했던 때가 기억나? 아직 늦지 않았어. 저기 저 사람들이 말하는 걸 흘려 넘기자. 가끔은 지도만 보고 역행을 떠나자. 지나가다 마음에 드는 식당에 가서 밥은 먹는 거야. 그러다 보면 낭만과 가까워졌다는 걸 느끼게 될 거야. 그때부터 남은 삶을 경험으로 채울 생각에 가습이 두근거리지 않을까? 나는 우리가 더는 단면적으로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 세상은 넓고 마음속에 일말의 순수함이 남아 있으니 말이야. 너무나 빠른 세상에 뒤처지는 것 같다고 한탄하기보단 떠날 수 있음에도 떠나지 못한 내 나약함을 탓하자. 사계절은 다시 돌아오고 우리에게 기회는 다시 울 거야. 그땐 더는 고민하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해. 


   우린 아직 뭐든지 할 수 있어.  

 

글 출처: 버텨온 시간은 전부 내 힘이었다(신하영 에세이, 딥앤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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