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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혁이에게 / 버텨온 시간은 전부 내 힘이었다

오작교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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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혁이를 처음 만난 건 2020년 가을, 북극곰처럼 큰 몸을 가지고 수줍게 안경테를 올리며 클래스룸으로 들어오던 그 아이가 나는 참 좋았다. 꽃다운 17살여께한 수강생 중 가장 어린 나이었다. 어수룩했지만 자기 이야기를 곧잘 꺼내었고 내가 던진 유머에 푸스스 웃어주기도 했다. 민혁이는 전교에서 1등 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민혁이는 방송국 PD가 꿈이었고,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 있었다.

   민혁이의 집은 부유했고 민혁이에게는 대인기피증과 우울증이 있었다. 민혁이는 가끔 외롭다고 말했고 종종 죽음을 생각하기도 했다. 민혁이는 책을 좋아했고 그 누구보다 글을 잘 썼다. 나는 그 아이의 서글픈 활자를 읽으며 내면 깊숙이 존재하는 감정을 보았다. 어두웠지만, 담담해서 슬펐다. 진득한 독백은 17살 아이의 우울이라 보기엔 점성이 강했고, 엄혹한 자기 검열에 자신을 죄인이라 부르는 게 안타까웠다. 그 뒤로부터 민혁이가 클래스룸에서 나갈 때마다 등을 두드려주곤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경청과 작은 손짓밖에 없었다.

   민혁이는 18살이 되고 나서도 나를 찾아왔다. 망원동에 오는 이 시간이 참 좋다고, 여기서만큼은 감정을 토해낼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그는 나직이 말했다. 같이 수업을 듣는 작가들도 곰 같은 민혁이를 예뻐했다. 그래, 민혁이는 이곳에서 사랑받는 느낌을 받았나 보다. 자기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들어주는 사람들이 참 좋았던 걸까. 내게 감사하다고 말하던 그 아이의 떨리던 입술이 아직 생각난다. 살기 위해 펜을 잡은 아이. 우울함에 잠식당하기 싫어 주먹을 쥐었던 사람.

   몇 달이 지난 후, 민혁이가 책을 만들고 싶다며 내게 방법을 물었다. 내심 기뻤다. 나는 이 아이가 서른 살쯤 된다면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작가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간 써 내려간 글을 오밀조밀 모아 내게 내밀던 열정이 너무나 고아서 전자책 출간을 도와주기로 했다. 제목은 '비명' 그는 작가 소개란에 위로를 구걸하고 우울을 토해내는 글밖에 쓸 줄 모르는 18살이라고 소개했다. 나는 민혁이에게 말했다.

   “민혁아. 어른이 되면 다 나아질 거야. 20살 되면 나랑 꼭 소주 한잔하자.”

   " 네 작가님 좋아요."

   나는 이 말이 그에게 구원이길 바랐다. 거만하게도 이 말이라면 민혁이가 그날을 고대하며 다음 계절을 기다릴 줄 알았다.

   19살이 되고 민혁이는 더 이상 나를 찾지 않았다. 대입 준비로 바빴을 것이다. 민혁이의 부모님은 학구열이 아주 강하신 분이니까. 실망하게 해드리고 싶지 않았을 테니 공부에 사력을 다했을 것이다. 나 또한 주변을 돌아볼 새 없이 바쁘게 지냈다. 그렇게 22년 7월. 민혁이가 다시 클래스를 신청했다. 민혁이는 신청란에 이런 말을 남겼다.

   -괜찮아진 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애석하게도 민혁이가 신청한 반은 이미 자리가 다 찬 뒤였다. 지금은 공석이 없다고, 어떻게 지내냐고 메시지 한 통을 해줄 수 있었지만, 정말이지 괜찮아진 것 잡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민혁이가 남긴 문장을 보고 나도 모르게 안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한 줄은 그가 나에게 보낸 구조 신호이자 마지막으로 남은 생의 불씨였다.

   그로부터 떨친 뒤, 민혁이가 세상을 떠났다.

   함께 클래스를 들었던 작가에게 비보를 듣고 재차 물었다.

   "저한테 얼마 전에 괜찮아졌다고 했는데요. 어떻게 아셨어요? 확실한 거 맞죠?"

   작가는 민혁이의 여동생에게 연락받았다고 했다. 오빠가 어제 세상을 떠났다고. 잘 따르던 사람인 거 안다고, 저희 오빠 잘 챙겨주셔서 감사하다고.

   눈물이 차오르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내가 만약 민혁이를 마주했다면, 어떻게 지내냐고 물어봤더라면, 형이 맛있는 거 사준다고 했던 거 기억하냐고 물었더라면 그 아이는 생의 의지를 이어가지 않았을까? 내가 정말 구원자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마지막 절규를 무지함으로 알아차리지 못한 나는 스스로를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부모님은 장례식조차 열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에게 묻고 싶었다. 도대체 당신들은 민혁이가 어떤 인생은 살았는지 알고 있었냐고.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몹시도 그를 아꼈지만, 그 무엇도 하지 못했다. 여동생의 변호를 받아 서둘러 연락했다. 마지막 인사를 전하는 방법이 있냐 물었지만 동생은 그럴 방도가 없다고 연신 죄송하다는 말만 했다.

   "만약 어딘가에 안치가 된다면 꼭 연락드릴게요. 그리고 감사합니다. 오빠가 작가님 이야기도 많이 했어요. 혹시 마지막으로 오빠가 쓴 글을 책으로 남기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그럼요. 제가 해드릴게요."

   이것이 내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인사였다.

   '악보'와 '밤낮의 모순' 그의 유작 이름이다. 이 책을 보내주고 난 뒤 비로소 민혁이의 안식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다. 시간은 흐르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는 다시 평범한 일상을 보낸다. 그렇지만 아주 가끔은 큰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의자에 앉던 민혁이가 생각난다. 서글픔을 토하다 눈물을 흘리던, 종이에 자신의 감정을 꾹꾹 눌러쓰던 그 아이가 생각난다.

  “민혁아. 잘 지내고 있지? 형도 잘 지내고 있어. 그때 연락 못 해서 미안해. 나는 정말 너를 구해 출 수 있었다고 믿었어. 내가 스승이 없어서 참 외로웠거든. 글 쓰는 네 보습을 보면서 좋은 스승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그냥 마음이 그래. 죄책감도 있고 아직 가슴에 아쉬움이 남아있는 것 같네. 형은 그 자리에서 계속 클래스하고 있어. 스무 살이 되면 진짜 소주 한잔하는 건데, 스무 살의 너는 무척이나 건강했을 텐데.

  형은 너의 순수함이 참 좋았어. 그리고 내 말에 위로받는 네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웠는지. 아직도 네 등을 만지던 감축이 생생해. 거긴 조용하지? 세상은 너무 어지러워. 그간 너무 바빴는데 이제야 너한테 제대로 인사를 한다. 년 모르겠지만 나는 널 아주 깊이 생각해. 이렇게나마 늦은 안부를 전한다. 거기선 더 많이 웃고 외롭지 않아야 해. 언젠가 내가 하늘로 올라가면 그때 우리 많이 대화하자. 미안해."


글출처 : 버텨온 시간은 전부 내 힘이었다(신하영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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