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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도 없이 오시다니 / 아버지 술잔에는 눈물이 절반이

오작교 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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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이 고등학생 시절의 가을 체육대회 날에 학급 대표로 배구 시합을 하다가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그늘에서 딸을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를 발견했다.

 

   아버지는 뭇 사람들 속에서 깊고도 특별한 눈길로 딸만 바라보고 있었다. 와글거리는 사람들에 가려져서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하는 아버지는 환영 같았다. 멀리 떨어져있는 아버지를 배구를 하다가 슬쩍 보았을 뿐인데도 빙그레 웃고 있다고 느껴진 것은 딸이 그렇게 믿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딸은 문득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 입학식과 졸업식에 아버지나 어머니 아무도 오지 않아 매우 서운했는데…. 하물며 가을 체육대회 정도에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버지가 예고도 없이 오시다니….’

 

   아버지를 발견한 순간부터 딸은 당황했다. 서브를 제대로 할 수도, 공 한번 받아치기도 힘들만큼 아버지의 눈길이 부담스러웠다.

 

   딸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너무 고지식해서 어렵고 두려웠던 존재였다. 돈을 벌기 위해 타향으로 떠난 뒤로는 한 달에 한번쯤 집에 와서 다음날 떠나버리곤 했다. 그런 아버지가 찹쌀떡과 우유를 사가지고 딸의 체육대회에 온 것이었다.

 

   점심때에 딸 옆에서 꾸역꾸역 떡 먹는 걸 지켜보았다. 아버지가 너무 어려워 딸은 “아버지도 좀 드세요” 하는 말도 못하고 혼자 그걸 다 먹었다. 목에 걸린 듯 뻐근하던 그때의 떡 맛을 딸은 지금도 못 잊고 있다.

 

   농토를 빚에 넘기고 변변히 살 수 있는 돈을 마련한다고 도시를 전전하면서 떠돌던 아버지가 어느 날 인편으로 딸에게 영어사전과 녹음기를 부쳐왔다. 제대로 배우지 못한 아버지는 자신의 한을 자식들의 공부를 통해 풀어보고자 한 것 같았다.

 

   아버지는 도시에서 날품을 팔다가 용접 기술을 배웠다. 그건 아버지에게 자부심이자 고통이었다. 어깨너머로 배운 용접 기술로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다니다가 용접 기술자로 중동에 3년 동안 파견되었다.

 

   아버지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부친 편지 끄트머리에 “월급에서 애들이 보고 싶은 책은 꼭 사줘라” 하고 썼다.

 

   귀국 후에 그런 딸이 고등학교에 가서 체육대회를 한다니까 아버지는 구두까지 닦아 신고 찾아와서 배구공 하나 멋지게 넘기지도 못한 딸을 지켜보고, 먹을 걸 말없이 주고 간 것이었다.

 

   아버지는 용접하는 과정에서 살 속까지 파고드는 불똥과 눈을 쑤시는 푸른 연기에 고통을 겪었고 병상에서 고생을 하다가 돌아가셨다.

 

   딸은 가끔 길을 가다가 뒤를 돌아볼 때가 있다. 딸이 고등학교 시절 체육대회에서 아버지가 오신 것을 떠올리며 그림자처럼 딸 뒤에, 뭇 사람들 속에, 시침 뚝 떼고 먼발치서 딸을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아서….

 

글 출처: 아버지 술잔에는 눈물이 절반이다(윤문원, 씽크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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