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법문 / 사랑은 사랑으로 돌아옵니다
인간이 하나의 파동이라는 사실은 구태여 양자물리학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미 상식이 된 세상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각자가 내는 파동이 다르니 그 파동을 통해 타인에게 이해되고, 타인을 받아들이고, 때로는 배척하거나 배척당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어떤 집단에서 잘 어울리지 못하거나 유난히 튀거나 별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두고 우리는 흔히 주파수가 다른 사람이란 표현을 하지만 인간이 하나의 파동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그 표현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주파수가 다른 사람은 배척하고 주파수가 같은 사람은 끌어당기는 것은 어쩌면 인지상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주적인 차원에서 보면 서로가 완전히 다른 별개의 파동은 없습니다. 지금 내가 배척하는 사람 또한 가만히 들여다보면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하는, 나와 너무나 유사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알고 보면 우리는 하나하나 날개도 떨어져 있는 존재 같지만, 사실은 서로 다르지 않은 불이(不二)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각자가 다른 파동을 내는 고유한 존재이면서 또한 서로서로 어울려 살아가야 하는 조화의 존재이기도 하지요.
따라서 내가 누군가 타인을 배척하는 것은 나 스스로를 배척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나와 파동이 다른 사람, 주파수가 다른 사람을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무작정 배척하기보다 그 존재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불이정신에 깃든 또 다른 의미이기도 합니다.
특히 많은 사람과 함께 생활하는 공간에선 불이의 의미를 현대적인 뜻으로 새롭게 해석해서 주파수가 다른 그 어떤 사람이라도 수용하고, 타인의 잘못에 관용을 베푸는 자비의 마음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요? 우주는 완벽한 조화 속에 돌아가고 있고, 불교의 진리 또한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완전한 조화를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0년 전만 돌아봐도 세상은 참 많이도 바뀌었습니다. 인터넷 등 미디어나 과학이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는 만큼 인류의 의식 또한 크게 발전했습니다.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을 통해 우리는 과거 천안통(天眼通)이니 천이통(天耳通)이니 하는 초월적인 능력이 열려야 접할 수 있던 일들을 실시간으로 접하고 있지요. 내 몸이 가닿을 수 없는 먼 곳의 현실까지 파악할 수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천안통이며 천이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실시간으로 보고 듣는다고 해서 마음의 문까지 따라서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에는 꿈도 꿀 수 없었던 그런 신통한 일들이 바로 나 자신에게 일어난다고 해도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구시대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기계의 발달일 뿐이지 인류 의식이 발전했다고 할 수 없지요. 그러나 그런 기계의 발달이 인류의 의식 변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그 변화를 따라 진리를 전하는 수단과 방법에도 커다란 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제가 열여섯 살의 어린 나이로 출가했을 때 일입니다.
그 당시 해인사 삼선암에 계시던 성문 노스님께서는 삭발한 저를 보시더니 손을 꼭 잡아주시며 “너는 훌륭한 법사가 되어라. 먼 미래에는 많은 사람이 부처님 법에 대해 한마디 듣기만 하여도 마음이 열리는 시대가 올 것이다.”라는 말씀하셨습니다.
일생을 선승으로 살아오신 노스님께서 참선을 열심히 하는 선객이 되라는 말씀에 앞서 법사가 되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이지, 스님의 그 말씀을 들은 저는 그 당시 법사가 뭘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것이 뭔지도 모르면서 노스님 말씀을 좇아 훌륭한 법사가 되겠다는 발원을 하게 된 것이 지금까지의 내 삶에 이정표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뒤, 노스님의 조언에 이어 나에게 법상의 길을 걷게 만든 또 다른 사건이 있었는데, 출가 후 처음 맞은 부처님 오신 날에 은사스님은 내게 상단 법문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겨우 열여섯 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에게 수백 명 대중 앞에서 초파일 법문을 하라니 지금 와서 생각해도 그것은 커다란 파격이었습니다.
무슨 법문을 어떻게 해야 할지 밤새 고심하다가 빈자의 일등에 관한 이야기를 법문 주제로 정하고 가난한 여인의 꺼지지 않은 등불처럼 나 또한 목숨이 꺼지는 그날까지 부처님 법을 잇는 등불로 살아가겠다는 발원 내용을 원고로 작성해 가져갔습니다. 그러자 은사스님은 법상에 오른 것처럼 그 자리에서 시범을 보여달라고 주문하셨지요. 스님 앞에서 저는 서툴게 법문을 시작했고, 그런 저를 바라보던 은사스님은 법문의 내용뿐 아니라 설법할 때의 손짓과 몸짓, 법상 아래 앉아서 법문을 듣고 있는 신도들과 눈빛으로 교감하는 방법까지 자세히 지도해주셨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스님은 마치 방송국의 PD와 같은 역할을 하셨던 셈인데, 그때 은사스님의 그런 역할이 얼마나 시대를 앞서가는 일이었던지 스님의 혜안이 새삼 놀랍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때 그 자리는 비록 높은 사자좌가 아닌 일상적인 탁자와 의자에 앉아서 했던 법문이었지만 내게는 높은 법상 못지않았습니다. 어린 사미니의 첫 법문이 훌륭했다고 해도 얼마나 훌륭했겠습니까만 그것이 설령 깨달음의 법문은 되지 못했을지언정 수행자로서 한생을 살아가겠다고 서원한 한 어린 영혼의 진리의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순수한 의식이나 다름없었고 그 순간부터 평생 수많은 장소에서 대중을 상대로 설법하는 법사로서의 제 꿈은 영글어갔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나비의 작은 날갯짓 하나가 바다를 건너면서 태풍으로 확대되는 ‘나비 효과’처럼 하나의 파동으로 시작된 우리의 생각 또한 처음에는 나비의 날갯짓에 불과하지만 커지면서 위대한 창조의 힘으로 작용합니다.
세상에 생각 없이 창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품는 생각 하나가 바로 물질을 만들어내며 때로 우리의 운명까지 좌지우지하게 되는 에너지라는 것이지요.
글출처 : 사랑은 사랑으로 돌아옵니다(정목스님, 감영사)
어떤 집단에서 잘 어울리지 못하거나 유난히 튀거나 별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두고 우리는 흔히 주파수가 다른 사람이란 표현을 하지만 인간이 하나의 파동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그 표현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주파수가 다른 사람은 배척하고 주파수가 같은 사람은 끌어당기는 것은 어쩌면 인지상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주적인 차원에서 보면 서로가 완전히 다른 별개의 파동은 없습니다. 지금 내가 배척하는 사람 또한 가만히 들여다보면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하는, 나와 너무나 유사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알고 보면 우리는 하나하나 날개도 떨어져 있는 존재 같지만, 사실은 서로 다르지 않은 불이(不二)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각자가 다른 파동을 내는 고유한 존재이면서 또한 서로서로 어울려 살아가야 하는 조화의 존재이기도 하지요.
따라서 내가 누군가 타인을 배척하는 것은 나 스스로를 배척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나와 파동이 다른 사람, 주파수가 다른 사람을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무작정 배척하기보다 그 존재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불이정신에 깃든 또 다른 의미이기도 합니다.
특히 많은 사람과 함께 생활하는 공간에선 불이의 의미를 현대적인 뜻으로 새롭게 해석해서 주파수가 다른 그 어떤 사람이라도 수용하고, 타인의 잘못에 관용을 베푸는 자비의 마음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요? 우주는 완벽한 조화 속에 돌아가고 있고, 불교의 진리 또한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완전한 조화를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0년 전만 돌아봐도 세상은 참 많이도 바뀌었습니다. 인터넷 등 미디어나 과학이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는 만큼 인류의 의식 또한 크게 발전했습니다.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을 통해 우리는 과거 천안통(天眼通)이니 천이통(天耳通)이니 하는 초월적인 능력이 열려야 접할 수 있던 일들을 실시간으로 접하고 있지요. 내 몸이 가닿을 수 없는 먼 곳의 현실까지 파악할 수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천안통이며 천이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실시간으로 보고 듣는다고 해서 마음의 문까지 따라서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에는 꿈도 꿀 수 없었던 그런 신통한 일들이 바로 나 자신에게 일어난다고 해도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구시대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기계의 발달일 뿐이지 인류 의식이 발전했다고 할 수 없지요. 그러나 그런 기계의 발달이 인류의 의식 변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그 변화를 따라 진리를 전하는 수단과 방법에도 커다란 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제가 열여섯 살의 어린 나이로 출가했을 때 일입니다.
그 당시 해인사 삼선암에 계시던 성문 노스님께서는 삭발한 저를 보시더니 손을 꼭 잡아주시며 “너는 훌륭한 법사가 되어라. 먼 미래에는 많은 사람이 부처님 법에 대해 한마디 듣기만 하여도 마음이 열리는 시대가 올 것이다.”라는 말씀하셨습니다.
일생을 선승으로 살아오신 노스님께서 참선을 열심히 하는 선객이 되라는 말씀에 앞서 법사가 되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이지, 스님의 그 말씀을 들은 저는 그 당시 법사가 뭘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것이 뭔지도 모르면서 노스님 말씀을 좇아 훌륭한 법사가 되겠다는 발원을 하게 된 것이 지금까지의 내 삶에 이정표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뒤, 노스님의 조언에 이어 나에게 법상의 길을 걷게 만든 또 다른 사건이 있었는데, 출가 후 처음 맞은 부처님 오신 날에 은사스님은 내게 상단 법문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겨우 열여섯 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에게 수백 명 대중 앞에서 초파일 법문을 하라니 지금 와서 생각해도 그것은 커다란 파격이었습니다.
무슨 법문을 어떻게 해야 할지 밤새 고심하다가 빈자의 일등에 관한 이야기를 법문 주제로 정하고 가난한 여인의 꺼지지 않은 등불처럼 나 또한 목숨이 꺼지는 그날까지 부처님 법을 잇는 등불로 살아가겠다는 발원 내용을 원고로 작성해 가져갔습니다. 그러자 은사스님은 법상에 오른 것처럼 그 자리에서 시범을 보여달라고 주문하셨지요. 스님 앞에서 저는 서툴게 법문을 시작했고, 그런 저를 바라보던 은사스님은 법문의 내용뿐 아니라 설법할 때의 손짓과 몸짓, 법상 아래 앉아서 법문을 듣고 있는 신도들과 눈빛으로 교감하는 방법까지 자세히 지도해주셨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스님은 마치 방송국의 PD와 같은 역할을 하셨던 셈인데, 그때 은사스님의 그런 역할이 얼마나 시대를 앞서가는 일이었던지 스님의 혜안이 새삼 놀랍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때 그 자리는 비록 높은 사자좌가 아닌 일상적인 탁자와 의자에 앉아서 했던 법문이었지만 내게는 높은 법상 못지않았습니다. 어린 사미니의 첫 법문이 훌륭했다고 해도 얼마나 훌륭했겠습니까만 그것이 설령 깨달음의 법문은 되지 못했을지언정 수행자로서 한생을 살아가겠다고 서원한 한 어린 영혼의 진리의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순수한 의식이나 다름없었고 그 순간부터 평생 수많은 장소에서 대중을 상대로 설법하는 법사로서의 제 꿈은 영글어갔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나비의 작은 날갯짓 하나가 바다를 건너면서 태풍으로 확대되는 ‘나비 효과’처럼 하나의 파동으로 시작된 우리의 생각 또한 처음에는 나비의 날갯짓에 불과하지만 커지면서 위대한 창조의 힘으로 작용합니다.
세상에 생각 없이 창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품는 생각 하나가 바로 물질을 만들어내며 때로 우리의 운명까지 좌지우지하게 되는 에너지라는 것이지요.
글출처 : 사랑은 사랑으로 돌아옵니다(정목스님, 감영사)





